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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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6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황장엽과 박승옥은 모스끄바에서 정식으로 결혼을 합니다. 결혼 후 박승옥은 평양으로 먼저 돌아가고, 아내를 떠나보낸 황장엽은 학업에만 전념합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인생관의 문제가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는 인간의 삶과 행복에 관한 문제, 이 문제를 더 발전시켜 봐야겠다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내가 청년시절에 관심을 가졌던 독일고전철학의 기본문제는 인식론이었다. 그래서 소련에 와서 처음에는 인식론을 공부했다. 그러나 철학적 사고에 관한 인식이 깊어지면서 인식론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가 인식론에 대해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했다.



“인식론은 다 해명이 되었다. 그래서 더 연구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에 와서 인식론은 이미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다.”



인생관에 관해서는 철학자들보다도 문학가들이 많이 다뤄왔다. 그래서 조선에 들어가면 책을 구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고 소련에 있을 때 가능하면 많이 읽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유학의 마지막 시간을 문학서적을 읽는 데 온전히 바쳤다. 나는 아침에 레닌 도서관에 나가 세계문학의 대표적 고전들을 읽다가 밤이 깊어서야 기숙사로 돌아오곤 했다.



이렇게 하여 4년에 걸친 나의 모스크바 유학생활은 끝났다. 모스크바 유학생활의 4년이 내 일생을 규정하는 귀중한 밑천이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사랑도, 지식도, 인류의 미래에 대한 신념도 이 시기에 마련되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그러므로 돌이켜볼수록 감개무량하지만, 한편으로는 오늘의 나의 비극의 뿌리도 모스크바에서 싹튼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따먹지 말아야 할 열매를 따먹은 아담과 달리, 나는 누구의 유혹도 없이 열매를 따먹었다고 생각한다.



비참한 조국의 현실



1953년 11월, 나는 모스크바를 뒤로 한 채 평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평양은 예전의 그 도시가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지상에는 집 한 채 보이지 않고 토굴들만 즐비했다. 전쟁 동안 인민들이 겪었을 불행과 고통을 함께 나누지 못하고 외국에 나가 편안히 살다온 것이 너무도 죄스러웠다.



귀국신고를 하자, 나는 김일성대학 철학 강좌장으로 승진 배치되었다. 감격할 만큼 이례적인 당의 배려였다. 나는 아내와 9월에 태어난 첫딸 선이를 데리고 전쟁 중에 대학이 피난했다는 순천군 자모산 밑의 백송리를 찾아갔다.



당시에도 나는 전쟁을 북이 일으켰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대립,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 간의 계급투쟁으로 전쟁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내 마음은 그저 빨리 북에 사회주의를 건설하여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실증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데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남한도 북의 사회주의를 따라와 저절로 통일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내 정신이 그랬으므로 생활은 해방 전보다 더 어려웠으나 무엇인가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주변에서는 좀도둑이나 유랑걸식하는 소년들과 소매치기하는 애들이 나날이 늘어갔다. 전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하게 국토를 짓이겨 놓았다. 내가 살던 집만 해도 비가 오면 방이 질퍽하게 물이 샜으며, 누우면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벌레가 온몸을 기어 다녔다. 쥐가 여기저기 구멍을 뚫어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연기가 방 안에 자욱히 고여 눈도 못 뜨고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다.



합동 강의실은 아궁이가 없어서 드럼통으로 만든 난로에 불을 때야 했다. 생솔가지가 땔감이어서 강의실에 연기가 가득 찼으나 문을 열어둘 수가 없었다. 문을 열면 잉크가 얼고 손이 곱아 학생들이 필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열악한 조건에서도 학생들은 물론 교원들까지 소련에서 유학했다는 내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학교당국도 나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나는 강의에 열과 성을 다했다. 학생들이 해주려고도 했지만, 우리 방에 쓸 땔나무는 한사코 내가 직접 해왔다. 먹는 게 변변치 않았는데도 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랐다. 식사 때 국은 언제나 무를 조금 썰어놓은 소금국이 나왔다. 우리는 이 국을 ‘염수대근탕’이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소금물에 큰 뿌리가 들어 있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염수대근탕을 매끼마다 먹는 바람에 다른 반찬이름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어느 날 배급소의 게시판을 보니 점심에 된장을 공급한다고 적혀 있었다. 오랜만에 끓여먹은 된장국은 그야말로 별미였으며, 한편으로는 생활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도 생겼다. 된장국 한 그릇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때 배웠다.



이런 일도 있었다. 이른 아침 솜동복을 입고 집에서 1㎞쯤 떨어진 강의실로 가는데 배급소 앞에 웬 사람이 떨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우리 강좌 교수였다.



“웬일로 이 새벽부터 여기서 떨고 있습니까?”



그러자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은 오늘 새벽에 제 처가 몸을 풀었습니다.”



“그래서요?”



“새로 태어난 아이 몫으로 배급을 타기 위해 나왔습니다.”



나는 그 교수에게 좋은 일이라고 말해 주고 가면서도 얼마나 생활이 어려우면 새벽에 난 아이의 배급을 그 새벽에 타러 나왔겠는가 싶었다.



아내는 소련에서 나와 결혼하느라 중도에 포기한 학업을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나도 대찬성이었다. 그녀는 사범대학 노어과를 통신으로 졸업하겠다면서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6부를 마칩니다.



연출: 박은수 / 낭독: 윤옥, 남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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