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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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1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오늘부터 황장엽의 회고록을 낭독해드립니다. 그가 소련 유학에 추천되어 모스크바 종합대학으로 떠나던 1949년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1949년 10월 초, 나는 파견 연구원들 그리고 파견 대학생들과 함께 평양을 떠났다. 두만강을 건너자 소련군용 트럭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워로실롭그라드 역’으로 태우고 갔다. 운전이 어찌나 난폭한지 차가 마구 요동을 쳐서 튼튼하지 못한 트렁크들은 박살이 나고 말았다.



역에서 돼지비계가 둥둥 떠 있는 고깃국이 나왔다. 몇 해 만에 처음으로 먹어보는 고깃국이라 기대를 하면서 달려들었는데, 도무지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어 실망했다. 소련사람들은 대소변을 보는 방법도 우리와 달랐다. 화장실이 급해 병사에게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한쪽을 손짓했다. 그러나 그쪽을 찾아보아도 화장실은 없었다. 돌아와 다시 물어보자 병사가 말했다.



“잘 찾아보면 있다.”



다시 병사가 가리키는 곳으로 가다가, 나는 어떤 소련사람이 가랑이를 벌린 채 돌멩이를 딛고 앉아 있는 걸 봤다. 소련에 기대를 걸었던 나는 맥이 빠졌다. 화장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모스크바종합대학에도 칸을 막은 화장실은 없고 훤히 트인 곳에 놓인 변기에 앉아 서로 얘기를 주고받으며 뒤를 보게 되어 있었다. 소변 보는 곳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처음엔 이상했으나 나중에는 습관이 되어 괜찮았다.



워로실롭그라드에서 출발한 열차는 끝없이 펼쳐진 벌판과 숲을 지나 반나절쯤 달리다가 멈추었다. 기차가 멈추자 부근 콜호즈(협동농장)에서 노동자들이 달려왔다. 당시 러시아는 물자가 너무도 부족하여 인민들의 생활상은 말이 아니었다. 그들이 목숨처럼 좋아한다는 보드카는 국제열차에서나 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이 달려온 이유도 술을 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것도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기차가 떠나는데도 계속 난간에 매달려 술을 마시는가 하면, 술병을 주머니에 넣으며 굴러 떨어지듯이 내리는 것이었다.



여자들은 음식물을 팔았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 손짓과 표정으로 겨우 거래를 할 수 있었다. 음악대학에 추천되어 가는 학생이 닭고기가 먹고 싶던 터에 한 아낙네가 계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계란을 가리키며 계란의 어머니가 있느냐고 했다. 그는 계란과 닭을 러시아 말로 뭐라고 하는지는 몰랐으나 ‘어머니’란 말과 ‘있다’는 말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계란을 가리키며 이것의 어머니가 있는지 묻자, 그 여자는 한참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삶은 닭을 가져왔다.



7일간을 계속 달려 드디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지방으로 가는 학생들이 떠나고 모스크바에 남은 인원은 다시 대학별로 배치되었다. 나는 중앙당학교 교원으로 있던 45세의 남자와 함께 모스크바종합대학 철학연구원에 입학했다. 첫 1년은 노어를 배우고 나머지 3년 동안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철학사 등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한 후 학위논문을 제출하기로 되어 있었다.



지도교수는 생물학에서도 학위를 받은 철학박사였는데, 자연과학에도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내가 소속된 연구원 정원은 30명이었다. 그러나 철학을 전공한 연구생은 40%뿐이고 나머지 60%는 전공이 각기 다양했다. 첫 대면에서 지도교수는 나에게 지금껏 무슨 공부를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정부에서 철학을 연구하고 오라고 해서 왔다고 궁색한 대답을 했다. 어떤 사람은 아는 척을 하다가 그 자리에서 무안을 당하곤 했다.



유학생들 중에서 내가 유리한 건 노어를 얼마간 공부했다는 점이었다. 나는 잘하지는 못했지만 번역을 하다 보니 단어를 적지 않게 알고 있었다. 노어선생은 여자였는데, 나는 그녀한테서 하루 건너 노어를 배웠다. 6개월이 지나자 강의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듣고 싶은 강의를 찾아다니며 듣고 또 열심히 책을 읽었다. 천문학 강의와 이론물리학 강의도 듣고 철학사 강의, 문학 강의도 들었다. 러시아문학과 철학사, 로마사도 읽었다. 그렇게 열심히 1년 동안 5천여 페이지를 읽었는데, 그때부터 어떤 책이든 사전 없이 볼 수 있게 되었고, 또 러시아어로 사고(思考)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모스크바의 조선 유학생들은 매일 저녁 연구원이나 공부를 잘한다고 소문난 학생 방에 모여 조선혁명과 관련된 토론회를 열었다. 유학생들은 이 토론회에서 서로 팽팽히 경쟁하며 두각을 나타내려고 애썼다. 그것은 이 토론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유학생 사회에 소문이 금세 퍼져 유명해지기 때문이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1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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