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 방송정보 | 종영방송
  • 출연진행:

공식 SNS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18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중쏘 간에 화의가 성립되고 공동성명이 발표되었으나 황장엽은 중쏘 론쟁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의 리익에 맞게 사상과 리론을 왜곡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보면서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명백한 과학적 기준이 없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황장엽은 사회주의의 미래를 위해 이론을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서기들은 경제에 대해 아는 척했지만 실제로 경제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창조적인 견해는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경제전문 서기들과 자주 논쟁을 벌였지만 3대 1의 대립으로 결판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김일성은 천리마운동에 대해 큰 의의를 부여하고 있었다. 천리마운동은 생산경쟁운동으로서 전개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으로까지 그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천리마운동은 다른 나라에서 진행되었거나 진행 중이던 생산경쟁과 구별되었다. 특히 생산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자를 공산주의 사상으로 교양하고 개조하여 생산성을 향상시킨다는 데 그 의의가 있었다. 즉 생산과정에서 서로 돕고 이끌어 주는 집단을 만듦으로써 생산에 집단적 혁신을 이룩한다는 것이었다.



천리마운동의 밑바탕이 된 사상은 군중노선이었다. 군중노선이라는 용어는 중국공산당에서 먼저 쓴 말인데, 당이 군중 속으로 들어가 군중과 고락을 같이하면서 군중을 사상적으로 교양하여 하나로 뭉치게 하고, 군중의 힘에 의거하여 혁명과업을 이룩한다는 의미이다.



나는 천리마운동에 이론적 의의를 부여하는 한편, 이 운동을 통해 인간교양 사업과 경제발전을 다 같이 힘있게 밀고 나갈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으로 내세우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으며, 나아가 군중노선에 관한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야 할 것으로 보았다.



나는 사회주의 경제제도가 수립되면 사람들이 서로 협조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마련된 것인 만큼, 천리마운동을 통하여 동지적 협조정신, 즉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의 이익을 더 귀중히 여기는 사상으로 무장시키기만 하면 생산 실적을 올릴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그때 소련 사회주의의 중요한 결함이 사람들의 협조정신을 앙양시키는 데 소홀히 하고, 또 일한 만큼 분배해 주라고만 강조한 데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일한 만큼 분배해 주라는 원칙이 지켜진 적이 없기 때문에 인민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던 것이다.



어쨌든 천리마운동은 나름대로 실속 있게 진행되었으며, 경제발전과 새로운 도덕적 기풍을 세우는 데도 성공을 거두었다. 천리마운동에서 뽑힌 기수들은 뒤떨어진 사람들을 교양하고 그 정신을 개조하기 위해 그들을 가르치면서 끈질긴 설득전을 폈다. 1961~62년에 북한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크게 놀랐다. 집에는 자물쇠를 잠그지 않았고, 도둑이 없었으며, 환자가 생기면 집단이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천리마운동을 생산 직장에서만 벌이지 말고 당 기관들에서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나는 혼자 글을 쓸 것이 아니라 여럿이서 협조하면서 쓰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하면서 실천에 옮겼다. 나는 글을 쓰라는 과업이 주어지면 조수들을 모아놓고 서로 의논하면서 써나갔다. 그렇게 하면 피로도 덜하고 주관주의로 흐르는 것도 막을 수 있었다. 나는 그 후로도 이 방법으로 글을 집필해왔다.



김일성은 당 일꾼들로 하여금 군중 속으로 들어가 고락을 같이하면서 군중에게서 배우고 가르쳐, 당의 정책을 관철하는 데 그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 김일성은 이 방법을 ‘청산리방법’이라 불렀다. 또 이 방법을 공장관리에도 도입하여 ‘대안의 사업체계’라고 불렀다. ‘대안의 사업체계’는 나중에 ‘당비서 독재체계’로 변질되었지만, 그것이 나온 초창기에는 지도간부들의 관료주의와 주관주의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즉 지도간부들과 생산자가 합심하여 생산과 건설을 힘있게 밀고나가도록 했던 것이다.



나는 김일성의 이 같은 창조적 활동을 있는 힘껏 지지했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사실 이때부터 나는 군중노선을 기초로 하여 주체사상을 더욱 체계화하려고 생각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은 노동당에서 내건 지도사상의 내용을 주체사상과 군중노선이라고 여겼으나, 나는 이 두 가지를 합쳐 ‘주체는 곧 군중’이라는 관점에 서게 되었다.



이때의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큰 나라들을 무조건 숭배하고 자기 나라를 깔보는 사대주의와 큰 나라의 것을 기계적으로 모방하는 교조주의를 반대하면서, 구체적인 실정에 맞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일성은 주체는 혁명이기 때문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북한혁명의 요구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혁명은 운동이기 때문에 주체라는 용어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혁명이라는 말 대신 인민으로 고쳐쓰기로 했다. 또 사대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한다는 것보다도 대국들로부터의 간섭과 지배를 반대하고, 주체인 조선인민의 민족적 이익을 고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마르크스주의를 구체적 실정에 맞게 적용하는 창조적 입장과 함께, 사대주의를 반대하고 자주적 입장을 지키는 것을 주체사상의 기본요구의 하나로 덧붙이게 되었다.



그 후 김일성은 자주적 입장과 창조적 입장을 기본정책으로 채택하고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로 기본노선을 정식화했다. 이것이 주체사상의 기본내용이며, 이 기본내용은 전적으로 김일성이 당시 북한의 실정에 맞게 내놓은 것이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18부를 마칩니다.

전체 0

국민통일방송 후원하기

U-friends (Unification-Friends) 가 되어 주세요.

정기후원
일시후원
페이팔후원

후원계좌 : 국민은행 762301-04-185408 예금주 (사)통일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