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 방송정보 | 종영방송
  • 출연진행:

공식 SNS

6. 25전쟁의 진실, 여섯 번째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10-28 18:37


나레이션: 1950년 6월 25일, 고요한 일요일 새벽의 평온을 무섭게 깨뜨리며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포성이 울려 퍼진다. 3년 동안 전개된 동족상잔의 엄청난 비극, 우리 민족 모두에게 커다란 불행과 고통을 들씌우고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킨 그 전쟁의 도발자는 과연 누구인가? 추적, 사건과 진실, 6. 25전쟁의 진실”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이야기> 김일성은 남침의 최종결정은 중국과 상의하라는 쓰딸린의 말에 따라 모택동을 찾아간다. 이미 쓰딸린이 남침을 승인한데다 국공내전 때 중국을 도와준 김일성과의 약속도 있었던 모택동은 남침계획에 선뜻 동의를 하는데……



쓰딸린의 허가에 이어 모택동의 동의까지 받아내자 김일성은 남침도발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1950년 5월 12일, 김일성이 평양주재 쏘련대사 슈티꼬브에게 전한 말이 옛 쏘련의 기밀문서에 기록되여 있다.



김일성 : 남진준비에 착수하도록 참모총장에게 명령했습니다. 남진하기에는 6월이 가장 적당하지만 그때까지 준비가 완료될지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당시 인민군 총참모부는 쏘련군 군사고문 바실리에프 장군과 포스토니꼬브 장군의 지도 하에 남침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남침 시기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는데, 쏘련의 고문들은 7월 중에 공격을 하자고 주장했다. 그때 가서야 군대장비와 전투준비가 완료된다는 리유에서였다. 하지만 7월은 장마철로 접어드는 시기라 전투력 손실 문제가 제기됐고 결국 6월 중에 남침을 개시하자는 김일성의 주장이 받아들여진다.



쏘련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인민군은 빠르게 무장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었다. 쏘련의 군사고문단도 전쟁경험이 풍부한 작전고문단으로 전면 교체됐다.



*성우: KBS 기록영화 조선전쟁 2부에서 주영복 당시 인민군 2군단 공병군관의 증언입니다.



주영복: “49년도 말까지 고문들은 훈련고문들이었어요. 인민군대를 훈련시키는 훈련고문들이 왔다가 6. 25가 터지기 4개월 전에 훈련고문들은 싹 보내고 대신 작전고문들이 왔어요. 이때까지는 교육관계 고문이었지만 이 사람들을 보내고 1월부터는 전쟁을 지도하는 고문들, 그 고문들이 한 4 -50명 왔지요”



김일성은 남침을 위한 무장력을 신속하게 갖추는 한편 남조선을 향해 대대적인 평화공세에 들어간다. 1950년 6월 7일, 김일성은 남조선에 통일정부 구성을 위한 북남 총선거를 제의했다. 사흘 뒤에는 1946년 이래 억류해온 조만식 부자와 남조선에서 간첩으로 체포된 리주하, 김상용을 호상교환하자는 제안까지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쓰딸린과 합의한 3단계 남침작전의 초기 단계, 즉 남침준비를 은폐하고 남조선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한 위장평화공세였다.



1950년 6월 15일, 드디어 김일성은 남침을 위한 모든 준비를 끝냈다. 슈티꼬브는 곧바로 모스크바에 보고했다.



슈티꼬브 :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진격한다. 조선인민군의 병단과 부대가 옹진반도를 공격하고 그 뒤 남조선의 서쪽 연안으로 총공격을 가한다.…….”



한편 같은 시기 남조선의 국군은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 우선 당시 국군의 전력수준부터 살펴보자. 1948년 남조선정부 수립에 맞춰 정식으로 발족된 국군의 모체는 1946년에 창설된 국방경비대였다. 그것은 군사조직이라기보다는 치안 예비조직에 불과했다. 게다가 미국은 국군을 창설할 때도 그 기본목적을 국내경비와 치안유지에 두고 있었다.



*성우: KBS 6.25전쟁 특별기획, ‘전쟁과 군인 제1편’에서 남조선 온창일 전 륙군사관학교 교수의 말입니다.



온창일: 미군이 국군을 창설할 때 소위 정비와 치안유지 목적으로 창설을 했습니다. 때문에 전투수행을 위한 전략이나 전술훈련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6. 25전쟁 전에 국군의 훈련수준은 중대 전술훈련 정도의 수준, 그걸 가지고 북한군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던 겁니다.



미군에 의해 창설된 국군은 초기에는 그 운영과 유지도 대부분 미군의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국은 당시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리승만 정부가 혹시라도 북진을 할까봐 전쟁 전까지 국군에 대한 지원을 극력 제한하고 있었다. 남침을 앞두고 북조선 인민군의 전력강화에 전적인 지원을 해주던 쏘련과는 매우 상반된 모습이었다.



*성우: KBS 기록영화 조선전쟁 2부에서 도널드 맥도널드 당시 남조선 주재 미국 대사관 서기관의 말입니다.



도널드 맥도널드(38:00- 38: 30): 사실은 미국의 군사원조가 있기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 리유는 원조가 너무 많을 경우 리승만이 북진할 지도 모른다는 미국 정부의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기억할지 모르지만 처음 리승만의 구호는 북진통일이었습니다. 그런 리유로 미국 측에서는 이승만에게 공군병력지원도 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당시 남조선의 국군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북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주시하면서 38선 일대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북의 남침공격 하루 전에 해제되게 된다.



*성우: KBS 기록영화 조선전쟁 3부에서 남조선 당시 장도영 국군 륙군본부 정보국장의 증언입니다.



장도영: 6월 10일부터 비상경계에 들어갔습니다. 참모회의에서 계속해서 이렇게 비상경계를 하니까 사기가 저하되고 오히려 군기가 해이해지는 그런 것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휴가도 보내고 또 그때 마침 농번기가 되어오고 고향에 보내서 농사 좀 돕게 해주고 하면 사기에도 또 좋지 않겠느냐, 이런 얘기가 나와서 6월 23일, 내가 잊을 수가 없어요, 6월 23일 24시를 기해서 경계를 해제했습니다."



북진을 우려하는 미국의 견제 속에, 전력과 방어태세도 채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남조선으로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추적, 사건과 진실, “6. 25전쟁의 진실” 여섯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전체 0

국민통일방송 후원하기

U-friends (Unification-Friends) 가 되어 주세요.

정기후원
일시후원
페이팔후원

후원계좌 : 국민은행 762301-04-185408 예금주 (사)통일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