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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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전쟁의 진실 다섯 번째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10-21 13:38


나레이션: 1950년 6월 25일, 고요한 일요일 새벽의 평온을 무섭게 깨뜨리며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포성이 울려 퍼진다. 3년 동안 전개된 동족상잔의 엄청난 비극, 우리 민족 모두에게 커다란 불행과 고통을 들씌우고 북과 남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킨 그 전쟁의 도발자는 과연 누구인가? 추적, 사건과 진실, “ 6. 25전쟁의 진실”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이야기> 1949년 말부터 국제정세는 김일성의 남침주장 실현에 유리하게 돌아간다. 남침은 절대로 안 된다던 쓰딸린도 비로소 흔들리기 시작하고 이후 모스크바로 간 김일성은 쓰딸린으로부터 기어이 남침승인을 받아내고야 마는데…….



쓰딸린은 김일성에게 남침을 승인하면서 최종결정은 중국과 상의하되 쏘련의 참전은 기대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만일에 있을 미국과의 충돌을 피하고 전쟁으로 인한 모든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다. 하지만 당시 머릿속이 온통 남침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김일성은 쓰딸린으로부터 남침을 승인받았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김일성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1950년 5월, 김일성은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해 모택동을 만난다.



모택동 : 그래 조선반도에 대한 쓰딸린 동지의 립장은 뭡니까?

김일성 : 38선 린근에 우리 병력을 집결시켜 평화통일에 대한 발의를 하면, 남조선이 즉각적인 거부의사와 함께 공격을 시도할 걸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때 전격적으로 남침을 하라는 게 쓰딸린 동지의 기본 전략입니다.

모택동 : 좋은 생각이오. 나와 중국 공산당은 쓰딸린 동지의 계획을 적극 지지합니다. 만약 미국이 전투에 개입한다면 중국은 북조선에 즉시 군대를 보내겠습니다.

김일성: (감격) 모택동 동지 감사합니다.



모택동은 김일성과 쓰딸린이 합의한 3단계 남침계획에 대해 지지의사를 표명했다. 사실 그 때까지 남침계획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던 모택동은 중국만이 그 론의에서 제외된 것이 불쾌하고 못마땅했지만 쓰딸린이 동의한 마당에 거부할 수는 없었다.



* 성우: KBS 기록영화 조선전쟁 2부에서 주지안롱 일본 가꾸슈인대학 력사학 교수의 말입니다.



“쓰딸린이 이미 승인을 한 이상 모택동이 반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구 김일성은 쏘련의 지지 하에 이미 충분한 준비를 했다고 했습니다. 사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지 얼마 안 된 중국으로서는 당시 조선전쟁에 상관할 여유가 안됐습니다. 그럼에도 모택동은 1950년 5월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기꺼이 동의를 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지 얼마 안 된 당시 중국은 국내적으로 일이 산적해 있었다. 조선전쟁에 나설 형편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모택동이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선뜻 동의한 리유는 무엇일까?



당시 모택동은 미국이라는 존재를 매우 경계하고 있었다. 미국이 국공내전 전 과정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장개석의 국민당을 계속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미국이 가까운 남조선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갓 태어난 사회주의 국가 중국으로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미국을 이기지 않고서는 세계혁명은커녕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도 지켜내지 못한다는 것이 그 무렵 모택동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 리유 때문에 모택동이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동의해준 것은 아니다.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 5월 14일 옛 쏘련의 기밀문서에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다. 모택동이 당시 중국을 방문한 김일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에게 한 말이다.



모택동: “조선반도에서의 전쟁은 전격전이 될 수도 있고, 장기전이 될 수도 있다. 당신들에게 전쟁 장기화는 불리하며 장기화될 경우 일본도 말려들게 되면서 일본이 남조선 정부를 지원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당신들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웃에는 쏘련, 만주에는 우리가 있으니까, 그리고 필요한 경우 우리는 중국군을 투입할 수 있다. 중국군은 모두 머리가 검기 때문에 북조선 군인지, 중국군인지를 가려내기 힘들 것이다”



모택동은 김일성이 쓰딸린으로부터 남침계획을 승인받기 훨씬 이전부터 조선반도에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경우 지체 없이 김일성을 도울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그것은 모택동이 국공내전 때 김일성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은 것과 관련이 있다.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본격화되던 1946년 후반, 장개석의 국민당 군은 심양과 장춘 등 중국 동북지방의 대도시를 점령하게 된다. 보급로마저 끊기고 급박한 상황으로 쫓기게 된 모택동의 공산당군을 도와준 것이 김일성이였다. 김일성은 급히 북조선의 북부지방을 중공군의 보급로로 열어주고 최대한 물적 지원까지 해준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모택동은 앞으로 자기도 기회가 되면 적극 도울 것임을 김일성에게 몇 번이나 약속했다. 실지로 모택동은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기울쯤인 1949년 여름, 전투경험이 풍부한 조선인 2개 사단 2만 명을 김일성에게 넘겨주었고 이듬해에도 조선인 한 개 사단을 추가로 보냈다. 이들 부대는 김일성의 남침전쟁에 큰 역할을 한다.



*성우: KBS 기록영화 조선전쟁 2부에서 센즈화 중국 동방사학회 현대사연구원의 말입니다.



“북조선에 대한 중국의 조선인 사단 파견은 김일성의 인민군 군사수를 늘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부대들은 모두 국공내전에서 단련되어 있어 훌륭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후에 조선전쟁에서 핵심적인 주력군의 역할을 한 것도 바로 중국 조선족 부대였습니다.”



이러 속사정과 함께 모택동은 쏘련의 지원을 받아 중공군을 현대적으로 무장시켜보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모택동은 쓰딸린에게 60개 사단 규모의 무기공급을 요청하는 등 조선전쟁을 중공군 현대화의 기회로 삼으려고 했다. 쓰딸린은 모택동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고 무기공급 문제는 이후 쏘련과 중국의 불화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듯 당시 모택동은 미국에 대한 경계심과 국공내전 때 자기를 도와준 김일성과의 약속, 또 조선전쟁 참전을 기회로 락후한 중공군을 현대화하려는 의도에서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선뜻 동의해 나선 것이다.



한편 쓰딸린의 승인과 모택동의 지원 약속까지 받게 된 김일성은 남침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추적 사건과 진실 “6. 25전쟁의 진실” 다섯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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