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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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전쟁의 진실, 일곱 번째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11-04 21:18


나레이션: 1950년 6월 25일, 고요한 일요일 새벽의 평온을 무섭게 깨뜨리며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포성이 울려 퍼진다. 3년 동안 전개된 동족상잔의 엄청난 비극, 우리 민족 모두에게 커다란 불행과 고통을 들씌우고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킨 그 전쟁의 도발자는 과연 누구인가? 추적, 사건과 진실, 6. 25전쟁의 진실”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이야기> 쏘련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김일성은 남침을 위한 모든 준비를 빈틈없이 갖춰나갔다. 한편 남조선의 국군은 북진을 우려하는 미국의 견제로 전쟁준비는 커녕 제대로 된 전투력이나 방어태세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전쟁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인민군 부대들은 속속 38선 린근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6월 23일, 기갑 려단, 독립보병 련대, 모터사이클 련대, 국경경비 려단과 함께 인민군 7개 사단은 모든 이동을 완료하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성우: KBS기록영화 6.25전쟁 3부에서 당시 김정석 인민군 2사단 중좌의 증언이다.



김정석: “6월 초순경에 함흥에서 렬차 편으로 원산, 철원, 금화, 이렇게 이동했습니다. 금화에 하차해보니까 그 당시 금화 역에는 포탄이 뭐 이건 거짓소리가 아니라 산더미같이 쌓여있는데 저희들도 놀랐죠.”



6월 24일 밤 9시, 남조선 국군에 대한 마지막 정찰명령이 내려졌다. 다음날 새벽, 인민군 각 부대에 전쟁신호를 알리는 전투명령 1호가 하달됐다. 공격개시 암호명은 폭풍,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포성이 울려 퍼졌다. 인민군은 서쪽의 옹진반도로부터 개성, 춘천, 강릉에 걸쳐 전면적인 남침공격을 개시하였다. 인민군은 거침없이 남으로 진격해갔다.



* KBS기록영화 6.25전쟁 3부에서 당시 인민군 전방 총사령부 통역관이었던 주영복 소좌의 증언이다.



주영복: "꽝꽝 소리 나잖아요. 비가 막 와요, 보이지도 않던 쏘련 사람이, 최현이 지금부터 전황이 들어오니까, 전황이 들어오는 것을 두 고문들한테 번역하라고 해요. 국군들이 포소리에 놀라서 진지를 막 때리고, 근거리에서 때리니까 국군진지 같은 것은 순식간에 날아가죠. 그러니까 점령하기 쉬웠죠. 그런 전황이 막 들어와요. 인제에서는 어디루 공격하고 또 어느 사단에서는 현리로 들어가고 뭐 ”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남조선의 국군은 기습적인 인민군의 공격에 미처 손 쓸 사이도 없었다. 사실 지난 몇 달 동안 전쟁 징후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소문과 첩보가 란무했던데다 공교롭게도 그날 군인들 과반수는 휴가와 외출로 부대를 빠져나간 상태였다. 제대로 된 저항도 할 수 없었던 국군은 쏘련 제 땅크까지 앞세우고 무섭게 달려드는 인민군의 공격에 꼼짝없이 무너졌다.



* KBS기록영화 6.25전쟁 3부에서 당시 남조선의 국군 6사단 리대용 중위의 증언이다.



리대용: “나도 륙군 중위지만 탱크도 처음 보고 자주포도 처음 봤거든요. 실물로 말이죠. 탱크하고 자주포하고 구분을 못했어요. 탱크가 막 나오는데 아이고, 우리는 탱크도 없는데 야단났구나, 그러나 우린 저 57mm 대전차포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안 되더라고요. 예.”



인민군은 개성과 포천을 일시에 무너뜨리고 서울을 향해 질풍같이 진격해갔다. 28일 오전 5시, 드디어 인민군은 서울을 완전히 점령했다. 남침개시 3일 만이었다. 그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는 서울이 해방됐다고 선포했다.



“서울시를 포위하고 있던 인민군 부대들은 오늘 28일 새벽에 서울 중심지대에 돌입하여 리승만 괴뢰정부의 정부청사를 비롯하여 서울 시청, 검찰청, 방송국, 각 신문사, 교통, 운수, 체신, 은행 등 중요기관들을 차지하였다. 28일 11시 30분, 영웅적 인민군대는 반공격을 개시한지 단 3일 만에 미제침략자들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서울을 완전히 해방시켰다.”



전쟁개시 3일 만에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기습적인 남침을 감행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북조선 당국은 남조선의 무력침공에 즉시 반공격으로 넘어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침공을 당한 쪽이 50키로 메터 거리에 있는 서울을 3일 만에 점령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저항도 못해보고 서울까지 내주게 된 남조선의 국군은 부랴부랴 전력을 정비해 상황을 수습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남으로, 남으로, 국군은 후퇴만 거듭할 뿐이었다.



하지만 당시 춘천일대를 지키고 서있던 남조선의 국군 6사단만은 전혀 달랐다. 처음부터 패배와 후퇴만을 거듭하던 다른 국군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인민군의 기습공격을 완강히 막아냈기 때문이다.



* KBS기록영화 6.25전쟁 3부에서 당시 국군 6사단 리대용 중대장의 증언이다.



리대용: “날벼락 맞은 기분이에요. 당시 그 대대장 상황설명을 들어보니까 적이 대 공세를 취해, 38선 전 전선에 걸쳐 적이 넘어오는데 벌써 춘천 바로 앞에까지 와 있다. 2대대, 3대대가 무너지고 있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빨리 우리는 나가야 되겠다고…….”



당시 국군 6사단은 전쟁 전부터 인민군의 이상한 징후를 감지하고 만일에 대비를 하고 있었다. 6월 24일부터는 사병들과 장교들의 외출을 전면 금지시켰다. 당시 국군 6사단 7련대 일등병으로 38선 경계 근무를 수행했던 안원흥 로인의 증언을 성우의 목소리로 들어보자.



“ 6월 19일에 인민군 병사 1명이 귀순해왔어요. 그 병사가 ‘1주일간의 야간 행군을 감행해 오늘 춘천시 사북면 신포리 부근 모래밭에 집결했다. 거기서 춘천시를 목표로 공격을 준비하다 죽는 것이 두려워서 귀순했다’는 거예요. 전쟁이 림박했음을 경고한 것이였지요. 또 그 무렵 38선 너머에서는 이상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됐어요. 도로에는 평소 안 보이던 자동차도 분주하게 오가고 밤마다 각종 엔진 소리가 들리곤 했습니다.”



덕분에 국군 6사단은 전력 면에서도 훨씬 우세한 인민군의 기습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3일 동안이나 춘천일대를 방어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인민군은 남진속도가 크게 지연되게 되고 전반적인 전략수행에도 차질이 빚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시간을 벌게 된 국군은 전쟁초기의 혼란 상태를 수습하고 한강방어전에 철저히 대비할 수 있었다. 전세는 인민군에게 점점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추적, 사건과 진실 "6. 25 전쟁의 진실" 일곱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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