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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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서해교전의 진실 8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9 21:04




김정일은 남조선이 세계적인 행사를 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고 또 질투했다.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남조선 비행기에 대한 폭탄테로 사건을 벌린 일이나, 서울 올림픽을 릉가하겠다며 제13차 청년학생축전을 벌린 일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남조선에 대한 김정일의 렬등감은 북조선의 경제를 무너뜨렸고 국제적인 테로국가라는 오명을 씌우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같은 결과에서도 교훈을 찾지 못한 김정일은 2002년 남조선이 세계축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하자 서해 앞바다에서 무력도발을 감행했다. <추적, 사건과 진실, 2002년 서해교전의 진실>



김정일은 속 시원히 무엇을 하라는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남조선의 세계축구선수권대회에 대한 방해공작이 필요하다는 암시를 주었습니다. 대회가 열리는 2002년 새해에 접어들자 발언 횟수도 많아졌습니다. 대남공작 부서들은 김정일이 무엇인가를 구상하고 있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짐작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파악할 수 없어서 엄청난 압박에 시달렸습니다.



대남공작 부서들의 답답함이 풀린 것은 4개월이 지난 2002년 4월 14일이였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90돐 생일을 하루 앞둔 이 날에 장령급 인사 55명에 대해 진급을 시켰습니다. 여기에는 99년 서해교전을 지휘했던 해군사령관 김윤심도 포함되여 있었습니다. 우리가 1차 서해교전에 대해서 살펴봤지만 김윤심은 남조선 함대에 큰 패배를 당하면서, ‘장군님의 어뢰알이 되겠다’는 말을 무색하게 했던 인물입니다. 이런 김윤심이 상장에서 대장으로 진급한 것입니다. 그동안 “최전선은 바다가 아니라 륙지”라고 자주 말해온 김정일이 해군사령관의 직급을 높여주었다는 것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였습니다.



그제서야 대남공작 부서들은 김정일의 심중에 어떤 구상이 담겨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직감은 그해 5월1일에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이날은 국제로동절이였기 때문에 김정일이 공장기업소나 협동농장을 방문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평양시 룡성구역 림원동에 있는 해군사령부에 나타났습니다. 해군사령부 본부 건물에 들어선 김정일이 벽에 걸려 있는 대형 그림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습니다.



김정일 : 해군사령관!



김윤심 : 네, 최고사령관 동지?



김정일 : 이 그림이 99년 서해교전 때의 그림 맞소?



김윤심 : 네, 그렇습니다.



김정일 : 다른 동무들도 이 그림을 똑똑히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최전선은 륙지가 아니라 바다입니다. 때문에 조국의 분계선은 민경이 아니라 해병들이 지키고 있는 것입니 다.



그림을 응시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 김정일이 해군사령관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습니다.



김정일 : 오늘 시간이 없지만 바다에서 싸움이 붙으면 어떻게 지휘하는지 꼭 봐야겠습니다.



김정일은 갱도 안에 있는 작전지휘통제실로 들어갔습니다. 지휘통제실은 조선반도 전체 바다를 감시하는 서해함대 및 동해함대의 작전을 지휘할 수 있도록 현대화된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김정일은 공군보다 싸움 준비를 잘해 놓았다면서 만족스러워 했습니다. 여기에서 김정일은 안내를 맡은 지휘관에게 99년 서해교전의 상황을 설명해보라고 요구했습니다. 지휘관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김정일이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김정일 : 나는 가장 힘들 때 서해교전 희생자들을 생각합니다. 공군에는 길영조가 있고 륙군에는 김광철이 있다면 우리 해군에는 서해교전의 영웅들이 있습니다.



김정일이 로동절에 해군사령부를 방문해서 ‘서해전선’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해군들의 위상을 한껏 높여주며 고무해준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아니다 다를까 김정일이 해군사령부를 방문한 직후에 99년 서해교전 작전을 세웠던 대남공작부서들의 특별그루빠인 ‘43조’가 다시 소집됐습니다. 이미 한번 해본 일이기 때문에 ‘43조’는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켰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작전계획은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물론 전투에 참가하는 해군들도 전투가 개시될 때까지 이 작전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출항을 앞둔 며칠 전에 함장의 비상명령이 떨어져, 디젤유를 보충하고, 그동안 방치돼 있던 고장난 보조 조타를 긴급하게 수리했습니다. 탄약도 평소와는 달리 가득 채우도록 한 것을 두고 이상하게 여긴 해군들도 몇 명 있었지만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습니다.



한편 김정일은 43조가 전투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남조선이 방심하도록 몇 가지 유화조치를 취했습니다. 4월3일에 방북한 남조선의 림동원 청와대 외교안보통일특보에게 5월에 ‘2차북남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고, 북남 철도련결을 위한 군사 실무자 회담을 재개한다’는 선물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5월11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를 평양으로 초청해 김정일이 직접 극진한 환대까지 해줬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정일은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답방 하겠다’는 그럴 듯한 말로 그에게 방북선물까지 해줬습니다. 과거 첨예한 체제대결을 벌렸던 ‘김일성의 아들’과 ‘박정희의 딸’의 만남은 김정일의 등 뒤에 감춰진 칼을 충분히 감추고도 남는 사건 이였습니다.



이렇게 치밀하게 사전 준비를 끝낸 김정일은 마침내 2002년 6월29일 서해해상경계선을 도발해 남조선 함대에 무차별적인 사격을 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2차 서해교전의 진실입니다. 이 서해교전으로 김정일은 남조선 청년들뿐만 아니라 또다시 북조선 청년 수십명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렇다면 김정일이 두 번째 벌린 서해에서의 무력도발로 얻은 성과가 과연 있을까요. 김정일은 후에 자기 측근들과의 자리에서 ‘1차 서해교전은 사실상 우리가 진 전쟁이였다면 2차 서해교전은 사실상 우리가 이긴 전쟁’이라고 스스로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2차 서해교전 참가자들에게 1차 서해교전 참가자들보다 더 높은 국가훈장을 주었고 특히 전사한 함장은 ‘공화국의 영웅남아’로 널리 선전했습니다.



하지만 2차 서해교전은 정치적으로 실패한 전투였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김정일의 기본 목적이였던 세계축구선수권대회를 방해하지 못했습니다. 남조선은 이 대회를 무사하게 마쳤을 뿐만 아니라 전체 4위의 성적을 기록하면서 국제적으로도 이름을 떨쳤습니다. 반면 김정일은 같은 동포의 잔치를 싸움으로 망치려고 한 침략주의자로 락인 찍혔습니다. 둘째로는, 북남간의 오랜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화해와 협력의 시대로 나아가려고 했던 남조선 인민들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어 북조선에 대한 적대감을 다시 고취시켰습니다. 끝으로 김정일은 1차 서해교전 때와는 달리 2차 교전 때는 남조선 군인 6명을 죽여서 ‘보복했다’고 기뻐했지만 이 보복을 위해서 북조선 청년 수십명을 처참하게 희생시켰습니다.



이처럼 서해교전은 김정일의 침략주의적 본성과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북조선 청년들의 목숨 따위는 헌신짝처럼 버리는 반인민성을 드러낸 사건이였습니다. 지금까지 총 8회에 걸쳐 진행된 ‘2002년 서해교전의 진실’을 마치겠습니다.



<참고 및 인용자료>

- <6.29 서해교전은 김정일의 ‘6·15 격침작전’이었다> 신동아. 2002.08

- <“연평해전·서해교전은 김정일 ‘평화협박 전술’ 지시받은 3호청사·인민무력부·해군사령부 합동작품”> 신동아. 2006. 07

- <박정성 전 해군 2함대사령관의 연평해전 비화> 신동아. 2008-06-25

- [긴박했던 교전상황] '돌아가라' 접근하자 北 기습. 조선일보. 2002.06.29

- [서해도발 교전상황] 쏘지않고 밀어내려다 당했다. 조선일보. 2002-06-30

- 서해교전 비화…北 수뇌부의 치밀한 계획. 조선일보. 2007-06-28

- [기고]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김홍렬·前해군참모총장 2008-06-27

- 고 윤영하, 한상국, 조천형 … 6년만에 마침내 영웅이 되다. 중앙일보. 2008.06.30

- LG 주간경제, 2001.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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