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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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서해교전의 진실 6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9 21:04




김정일은 남조선이 세계적인 행사를 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고 또 질투했다.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남조선 비행기에 대한 폭탄테로 사건을 벌린 일이나, 서울 올림픽을 릉가하겠다며 제13차 청년학생축전을 벌린 일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남조선에 대한 김정일의 렬등감은 북조선의 경제를 무너뜨렸고 국제적인 테로국가라는 오명을 씌우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같은 결과에서도 교훈을 찾지 못한 김정일은 2002년 남조선이 세계축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하자 서해 앞바다에서 무력도발을 감행했다. <추적, 사건과 진실, 2002년 서해교전의 진실>



3호청사 핵심간부와 당 조직지도부 군사담당 성원을 접견한 서해함대의 젊은 함장들은 그제서야 해군사령관 김윤심이 자신들을 만난 리유를 알게 됐습니다. 당의 지시를 접수한 함장들은 ‘당에서 부여한 혁명과업을 피로써 수행하겠다’고 결의를 다졌습니다. 서해교전의 임무를 맡은 함장들에게 역시 비밀엄수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함장들은 전투에 참가할 병사들에게조차도 ‘서해전선 사업’의 목적이나 내용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병사들은 교전 당일날 함장의 사격지시가 있고서야 자신들이 전투에 내던져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6월15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전 7시15분 안개가 엷게 깔린 서해 연평도 린근 바다에 북조선 어선 5척이 해상경계선을 넘어 남측 해역에 들어왔습니다. 10분 뒤 8척의 어선이 추가로 경계선으로 넘어와 꽃게잡이를 시작했습니다. 어선들을 앞세운 북조선 해군은 7시55분 80톤급 경비정 2척을 남하 시켰습니다. 이어 어뢰정 3척의 호위를 받으며 다른 경비정 2척이 남측 바다를 침범했습니다. 북조선 경비정들의 함포는 남조선 함정들을 조준하고 있었고 어뢰정의 발사관도 개방되여 있는 상태였습니다.



남조선 해군들은 북조선 경비정이 거듭 해상경계선을 침범하자 경고방송을 하며 밀어내기식 충돌작전에 들어갔습니다. 2002년과 마찬가지로 99년에도 남조선 해군들은 김대중 정부의 지시에 따라 선제공격을 하지 못하게 되여 있어서 위험을 무릅쓴 채 북조선 경비정의 앞을 가로막는 ‘차단기동작전’을 시작한 것입니다. 9시25분 밀고 당기는 충돌이 계속되는 가운데 남조선 고속정이 북조선 경비정 381호의 꼬리 부분을 들이받았습니다. 그 순간 381호의 병사들이 일제히 갑판 우에 올라와 조준사격 자세를 취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25mm 기관포가 불을 뿜었습니다.



북조선 어뢰정 3척도 공격에 가담했습니다. 남조선 해군도 즉각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북조선 해군이 선제공격을 했지만 장비와 화력에서 남조선 해군에 밀려 금세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북조선 해군들이 함포를 수동으로 조작해 쏘는 동안 남조선 해군은 정교한 사격통제 레이더에 의해 조정되는 자동 함포로 포탄을 비오듯 퍼부어 댔습니다. 9시30분 남조선 함정에서 발사한 40mm 포가 북조선 경비정 1척에 명중됐습니다. 굉음과 함게 북조선 경비정이 크게 흔들렸고 불기둥이 하늘로 솟아올랐습니다. 흥분한 북조선 해군들이 함포와 기관총을 미친듯이 쏘았습니다. 그 기세에 밀려 잠시 주춤하던 남조선 함정에서 다시 함포사격을 시작했습니다. 북조선 어뢰정 한척이 남조선 전함에서 발사한 76mm포 19발을 맞고 침몰했습니다. 북조선의 다른 경비정 한척도 침몰됐고 3척은 크게 부서졌습니다. 전투를 지휘하던 남조선 2함대 사령관은 북조선 함정들이 더 이상 대응을 못하자 공격을 중단시켰습니다. 확전을 금지한 상부의 지침도 있었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인명구조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사격이 멈추자 북조선 해군은 서둘러 퇴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투는 14분 만에 남조선 해군의 대승리로 끝났습니다. 이날 해전으로 북조선 해군은 사망자만 24명이였습니다. 반면 남조선 해군은 한명의 사망자도 없었고 다만 11명이 가벼운 부상을 입은 정도였습니다. 함정의 피해도 고속정 한척과 전함 한척이 포격으로 일부 파손된 것에 그쳤습니다. 한편 전투가 진행되던 순간 조선중앙텔레비죤은 모든 프로그람을 중단하고 전쟁개시 소식처럼 서해교전 소식을 련속 보도했습니다.



방송원 :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오늘 남조선 괴뢰들이 서해 해상경계선을 침범해 군사적 도발행위를 감행했습니다. 지금 해상경계선 우리측 지역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남조선에서 쌀이 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호의를 품고 있던 인민들은 서해교전 소식을 듣고 경악했습니다. 조선 전체가 반 남조선 감정으로 달아올랐습니다. 김정일은 당 내의 모든 조직을 동원하여 남조선에 대한 주적교양과 ‘해전에서의 혁혁한 성과’를 선전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온 나라가 반 남조선의 열기로 들끓고 있는 가운데 참혹한 패배를 당한 인민무력부와 해군사령부는 책임문제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습니다. 3호청사 부서들도 예상 밖으로 커진 전투규모와 피해 때문에 당황해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어뢰알이 불발탄’으로 끝난 김윤심 해군사령관은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 몰라 발편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상황을 풀어준 것은 뜻밖에도 김정일이였습니다. 교전이 난지 이틀 후인 1999년 6월 17일 김정일은 “싸움 그 자체보다 그 싸움이 주는 효과를 잘 리용하는 것이 당초 목적이였던 것만큼,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라며 작전에 참가한 사람들을 격려했습니다. 3개월 뒤인 9월에는 김윤심의 불안도 말끔히 씻어 주었습니다.



녀1 : 철희 아버지, 서기실이랍니다.



김윤심 : 뭐, 서기실. 김...김윤심 전화받습니다.



서기 : 장군님께서 조선인민군 공훈합창단 공연을 같이 보자고 합니다.



김윤심 : 네, 알겠습니다!



궁지에 빠진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김정일 특유의 용인술이 발휘되는 순간이였습니다. 김정일의 신임을 확인한 인민무력부와 해군사령부, 3호청사 성원들은 서해 해상경계선에 대한 후속전략을 서둘러 추진했고, 군부는 군부대로 다음 전투 준비를 위해 함대의 군사기술상의 보완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추적, 사건과 진실, 2002년 서해교전의 진실>, 여섯 번째였습니다.





<참고 및 인용자료>

- <6.29 서해교전은 김정일의 ‘6·15 격침작전’이었다> 신동아. 2002.08

- <“연평해전·서해교전은 김정일 ‘평화협박 전술’ 지시받은 3호청사·인민무력부·해군사령부 합동작품”> 신동아. 2006. 07

- <박정성 전 해군 2함대사령관의 연평해전 비화> 신동아. 2008-06-25

- [긴박했던 교전상황] '돌아가라' 접근하자 北 기습. 조선일보. 2002.06.29

- [서해도발 교전상황] 쏘지않고 밀어내려다 당했다. 조선일보. 2002-06-30

- 서해교전 비화…北 수뇌부의 치밀한 계획. 조선일보. 2007-06-28

- [기고]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김홍렬·前해군참모총장 2008-06-27

- 고 윤영하, 한상국, 조천형 … 6년만에 마침내 영웅이 되다. 중앙일보. 2008.06.30

- LG 주간경제, 2001.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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