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력사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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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과 6.25 조선전쟁의 전개 과정

청소년을 위한 력사강좌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2




안녕하세요. <청소년을 위한 력사 강좌>의 장성무입니다. 오늘은 제13과 ‘6.25 조선전쟁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김일성이 남조선을 공산화하기 위해 쏘련의 승인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6.25조선전쟁은 미국과 유엔군이 공산주의 국제세력의 공세로부터 남조선을 방어하기 위해 참전하고, 뒤이어 중국이 북조선을 돕기 위해 참전함으로써 국제전으로 확대됩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최신 쏘련제 땅크를 앞세운 조선인민군이 남조선을 침공하자 미국은 유엔안전보장리사회의 긴급 소집을 요구하고 같은 날 오후 2시 유엔안전보장리사회는 미국이 제출한 전쟁중지 결의안을 채택합니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은 이를 무시하고 남침을 계속하여 전쟁 개시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남진하여 7월에는 대전, 8월과 9월 사이에는 경상도의 일부만을 제외한 남조선 전역을 점령해나갑니다.



그러자 유엔안전보장리사회는 회원국들에게 남조선을 도울 것을 권고하고 7월 7일 유엔의 군사활동을 위하여 미국에게 최고지휘권을 위임하는 결의를 채택합니다. 이로써 미극동군사령관 맥아더가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되고 이를 지지하는 16개 나라의 군대로 구성된 유엔군의 파견이 결정됩니다. 이러한 미국과 유엔군의 전쟁 참여는 1950년 1월 ‘남조선과 대만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발표만 믿고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던 김일성을 매우 당황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전쟁에 참여한 유엔군은 남조선 국군과 함께 1950년 8월 남해안 마산에서 시작하여 락동강을 따라 동해안을 련결하는 최후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그리고 9월 15일 새벽에 실시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일시에 뒤집어집니다. 유엔군과 남조선군은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한 후 10월 1일 38도선을 넘어 19일에는 평양까지 진격하게 됩니다.



유엔군과 남조선 군대가 38도선을 넘어 북조선으로 진격하자 10월 26일 팽덕회를 지휘관으로 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이 드디어 전쟁에 참전합니다. 미국은 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가능성에 대하여 불안감을 지니기는 했지만 중국본토의 통일을 이룩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고, 대만문제까지 있어 중국인민지원군이 조선전쟁에 개입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었습니다.



그러나 20만 명이 넘는 중국인민지원군이 진격해오자 당황한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하며 12월 4일에는 평양, 12월 24일에는 흥남을 거쳐 1951년 1월 4일 결국 서울을 다시 빼앗기게 됩니다.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반격에 나선 유엔군이 3월 14일 다시 서울을 탈환하고 3월 24일에 38도선을 다시 넘어 6월 11일에는 철원, 금화 등을 점령하며 이때부터 전쟁은 서로 밀고 당기는 장기전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상치 못했던 미국과 유엔군의 참전으로 당황하고 여기에다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에도 조선 전쟁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쏘련은 1951년 6월 23일 유엔 주재 쏘련대표 말리끄의 성명을 통하여 조선전쟁의 휴전을 공식 제기합니다. 이에 대해 미국과 유엔은 쏘련의 휴전 제안을 즉각 수용합니다. 중국인민지원군에 이어 쏘련군까지 전쟁에 개입하면 조선의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북과 남, 그리고 전쟁에 참여한 많은 국가들에 엄청난 인명피해를 남긴 조선전쟁은 정전협정을 맺는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청소년을 위한 력사 강좌> 제13과 ‘6.25조선전쟁의 전개 과정’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다음 이 시간에는 제14과 ‘정전협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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