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력사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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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조선전쟁, 어떻게 시작되었나?

청소년을 위한 력사강좌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2




안녕하세요. <청소년을 위한 력사 강좌>의 장성무입니다. 오늘은 제11과 ‘조선전쟁 - 어떻게 시작되였나?’를 살펴보겠습니다. 1948년 8월 15일과 9월 9일 북과 남에 각각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조선은 이 두 개의 나라로 갈라지게 되지만, 분단을 결정적으로 고착화시킨 것은 6.25조선전쟁이었습니다. 북조선에서는 6.25조선전쟁이 미제의 지시와 리승만 도당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고등중학교 6학년 교과서 ‘미제와 일제의 조선침략 죄행’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50년 1월 미륙군장관 로이얄놈이 남조선에 기여들어 괴뢰군의 북벌계획을 지도하였다. 2월에는 맥아더놈이 리승만 역도와 괴뢰군 참모총장놈을 미극동군사령부에 불러다가 북반부를 침공할 데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주었다. 6월 18일 미국대통령 트루맨의 특사로 남조선에 기여 든 덜레스는 미군사고문관 및 괴뢰군고위층을 이끌고 38도선일대를 시찰하면서 북벌에 대한 작전계획을 최종적으로 검토 비준하였다. 다음날에는 리승만 도당에게 6월 25일 북반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할 것을 지시하였다.’



과연 이러한 북조선의 주장이 사실일까요?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6.25전쟁은 김일성이 남조선을 공산화하기 위해 쏘련의 승인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전쟁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전쟁 전후에 김일성과 쓰딸린 사이에 오간 쏘련의 비밀 외교문서가 공개되면서 확인되였습니다. 처음에 김일성은 남조선 내부에서의 공작이나 무장봉기를 통해 리승만 정부를 무너뜨리고 조선반도의 공산화를 완성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거듭 실패하면서 무력을 통한 남조선 공산화로 전략을 수정한 김일성이 1949년 3월 쏘련을 방문하여 쓰딸린에게 남조선을 침공할 경우 쏘련의 지원 가능성을 타진합니다. 그러나 쓰딸린은 김일성의 남침 제안을 거부하고, 그 대신 대규모의 군사원조를 약속합니다. 미국과의 전면 승부는 아직 이르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대신 쏘련은 6개 보병사단과 3개 기계화부대, 비행기 150대의 원조를 하여 훗날을 준비토록 합니다. 또한 김일성은 같은 달 중국공산당과의 군사비밀협정을 맺어 중국인민해방군에 편입되어 있던 조선인 2개 사단, 약 3만 명을 조선인민군에 편입하며 군사력을 급속히 강화합니다. 이런 가운데 1949년 8월에 쏘련이 핵시험에 성공하고, 10월에는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중국 대륙에서의 혁명승리를 선포합니다. 또한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남조선과 대만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는데 이것은 남조선이 위험에 빠지더라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겠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동북아세아의 정세가 공산주의 세력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쓰딸린은 1950년 4월 기존의 유보적인 립장을 바꿔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합니다. 쓰딸린은 김일성의 남침이 미국과의 랭전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쓰딸린은 김일성에게 모택동과 협의하고 도움을 받도록 지시하고, 모택동도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미국이 전쟁에 개입할 경우 중국도 전쟁에 참여할 것을 약속합니다.



결국 1950년 6월 25일 새벽, 대규모 포사격을 시작으로 북조선의 기습 남침이 시작됩니다.



<청소년을 위한 력사 강좌> 제11과 ‘조선전쟁-어떻게 시작되였나?’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다음 이 시간에는 제12과 ‘조선전쟁의 전개 과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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