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력사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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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해방과 분단 시기 조선의 경제 상황

청소년을 위한 력사강좌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2




안녕하세요. <청소년을 위한 력사 강좌>의 장성무입니다. 오늘은 제5과 ‘해방과 분단 시기 조선의 경제 상황’입니다. 조선의 력사를 리해하는데 정치적 상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경제적인 상황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해방과 분단 시기 북과 남의 경제 상황을 살펴보면서 이후 발생될 북과 남의 력사를 예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으로부터의 원료와 자재 공급이 중단된 남조선의 경제는 큰 혼란을 겪게 됩니다. 1946년도 제조업 생산액을 보면 1939년에 비해 30% 수준에 불과했고 공장의 종업원 수도 1943년 20만 명에서 1946년에는 11만 명으로 급격히 줄어듭니다. 당시 남조선의 공업은 주로 방직, 식료품 등의 경공업이 중심이였고, 반면에 북조선은 전기, 화학, 철강 등의 중공업이 중심이였습니다. 특히 38도선이 그어진 후 쏘련이 남조선과의 모든 교통과 통신을 차단하면서 북과 남의 경제가 단절되자 남조선의 경제는 더욱 악화되였습니다.



북조선의 화학공업으로부터 비료 공급이 되지 않자 남조선의 농업은 바로 타격을 받았습니다. 또한 생산이 위축되자 물가가 치솟기 시작했고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자 통화증발로 급한 재정수요를 메울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일본 등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가 약 120만 명, 북조선에서 월남한 동포가 약 100만 명에 달하여 남조선 경제의 혼란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남조선의 악화된 경제는 1947년 1억 8,000만 딸라로 증가한 미국의 대규모 원조로 다소간 안정을 보이고 부문별로 활발한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1948년 북조선에서 오던 전기가 끊기자 또 한 번 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남조선이 이 같은 혼란의 련속이었던 반면, 북조선의 상황은 비교적 안정적인 가운데 회복도 빨랐습니다. 원래 일제가 식민지시기에 건설한 북조선의 공업은 현지의 원료와 동력에 기초한 것이어서 상당히 자급적이었던 것이였고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200명 이상의 로동자가 있는 대규모 공장이 무려 220여 개나 달했고 북조선의 1인당 철도길이나 발전량은 일본을 릉가하는 수준으로, 해방 당시 북조선은 세계적인 공업지대로 변모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기술자들을 억류하여 그들의 고급 기술을 전수받고 쏘련으로부터도 기술 원조를 받았습니다. 북조선은 일본이 건설해 놓은 무기 제조공장에서 작은 총과 기관총, 박격포, 탄약과 같은 무기들을 생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남조선에서 이러한 무기들이 생산된 것은 그보다 한참 후인 1970년대나 가능했습니다.

이렇듯 해방과 분단 시기 북조선과 남조선의 경제 상황은 많이 달랐습니다. 당시 남조선은 경제를 안정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나마 미국의 원조를 받아야 겨우 꾸려가던 남조선 경제는 1961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수출을 주도로 하는 수출주도공업화전략으로 고도성장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북조선 경제의 초기 조건은 매우 양호한 편이었기 때문에 쏘련은 경제적 안정을 바탕으로 토지개혁을 비롯한 사회주의적 개혁을 일사분란하게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남조선보다 월등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남조선을 무력으로 통일할 계획을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습니다.



<청소년을 위한 력사 강좌>제5과 ‘해방과 분단 시기 조선의 경제 상황’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다음 이 시간에는 제6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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