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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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사상의 숨겨진 진실, 여섯 번째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9 21:05




지금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주체사상의 탄생배경과 1960년대 초반까지의 내용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여섯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주체사상’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한번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김정일 독재집단은 자신들의 주체사상이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갖췄고 력사도 오래되였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1960년대 초반까지 공화국에서 ‘보편적 의의를 가지는 철학적 원리에 기초’한 ‘주체사상’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단지 김일성이 쏘련과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내놓은 ‘주체로선’이 있었을 뿐입니다. 김일성 스스로도 맑스-레닌주의를 조선의 구체적인 현실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할 것을 강조했을 뿐, 맑스-레닌주의와 구별되는 새로운 사상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처음에 김일성은 ‘주체를 세울 데 대하여서만 강조’했을 뿐 ‘주체사상’이라는 말은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1950년대 후반까지 아예 ‘주체사상’이라는 말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958년부터 ‘중앙당 서기실 리론서기’라는 직책으로 ‘김일성의 비서실’에서 일했던 황장엽은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주체사상이라는 말을 누가, 언제부터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로동당 중앙위원 회 김일성의 비서실에 출근한 것은 1958년 1월 3일이었는데 그때까지는 주체를 세운다는 말만을 쓴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후 주체사상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다음에도 그것은 맑스-레닌주의를 조선의 현실에 창조적으로 발전, 풍부화시킨 사상이라고 지적하였을 뿐입니다. 이 주체사상을 독자적인 사상체계로 만드는 사업은 197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는데, 이때도 김일성, 김정일이 아니라 학자들이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의 연구 성과는 그 진수가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채 김일성․ 김정일의 개인독재를 정당화하는 방향에서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김일성이 창시한 사상이 없기 때문에 ‘주체사상’이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에서 지적한 점들과 상관없이 일반적으로 주체사상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겠습니다. 다만 시기별로 내용의 차이가 있는 만큼 ‘주체로선’이나 ‘김일성 혹은 김정일의 주체사상’이라는 말로 구분을 짓겠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시간에 밝힌 대로, 김일성의 ‘주체로선’이 북조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이것이 어떻게 수령절대주의를 옹호하는 사상으로 변질되게 되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김일성이 주체를 강조한 것은 비록 자신의 독재체제를 강화하는데 근본 목적이 있었지만, 당시 북조선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북조선 뿐만 아니라 많은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쏘련을 무조건 지지하고 쏘련의 모범을 무조건 따라가려는 사대주의와 교조주의가 농후했습니다. 이러한 폐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적지 않은 나라들에서 민족적 주체를 세우는 문제가 강조되였습니다. 주체를 세우는 문제가 비단 북조선에서만 제기된 문제는 아니였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김일성의 주체로선은 시대의 추세에도 맞았고 조선의 실정에도 맞았기 때문에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로 평가할 수 있는데, 첫째는 주체를 내세움으로써 정치로선과 정책을 결정하는 데서 사대주의와 교조주의적 오류가 극복되고, 자주독립국가로서의 정치, 경제, 군사적 지반이 강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민대중의 창조적 적극성을 옳게 발동시켜 당과 국가의 정책관철에서 성과를 거둔 것입니다. 이 성과는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되여 1960년대까지 이어졌던 천리마운동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이 천리마 운동입니다. 천리마 운동을 진행하면서, 군중로선에 기초해 주체사상에 대한 리론화 작업이 시작됐고, ‘주체, 자주, 자립, 자위’라는 4대 기본로선도 나왔기 때문입니다. 또한 북조선의 황금기라고 말하는 시기도 천리마 운동 시기와 일치합니다. 이 때를 황금기라고 말하는 리유는, 경제건설과 사회의 정신도덕건설, 정치건설의 모든 면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뒀기 때문입니다. 천리마운동을 체험했던 김성철 동무의 이야기를 잠시 들어보겠습니다.



김성철 : 천리마 운동의 구호가,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그 구호 밑에서 내 기억에는 그 당시에, 사회나 가족이나 모두 집단 내에서 화목하고, 공산주의적으로 살며 일해겠다는 그게, 겉으로가 아니라 진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그런 생활력이었다. 그런 발현이니까 당연히 잘 될 수밖에 없는 거지요.



북조선이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군중로선’에 있었습니다. 군중로선은 중국혁명 당시 모택동이 제기했던 사상으로 ‘군중에 의거하고 군중을 발동시켜 문제를 풀어나가자’는 사상입니다. 김일성은 주체사상의 견지에서, 이 사상을 적극 지지하고 그것을 관료주의를 극복하고 대중의 창발성을 발양시키는 기본방법으로 리용하게 되였습니다. 그 결과 생산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이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의 정신 도덕적 풍모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고, 당과 대중의 정치사상적 통일과 단결이 강화되였습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천리마 운동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조선로동당이 견지하여야 할 총로선으로 규정되였습니다. 하지만 북조선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체’의 자리에서 ‘인민대중’이 끌어내려지고 그 빈자리를 ‘김일성’이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민대중 중심의 주체사상이 김일성 중심의 주체사상으로 점차 변질되면서, 공화국은 수령의 절대적 권위만을 옹호하는 기형적인 체제로 변질되여 갔습니다.



<추적, 사건과 진실, 주체사상의 숨겨진 진실>, 여섯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참고 및 인용자료>

1. 황장엽 회고록. 시대정신

2. 개인의 생명보다 귀중한 민족의 생명. 시대정신. 황장엽 지음

3. 현대 북한의 지도자. 을유문화사. 서대숙 지음

4. 한 권으로 보는 북한사 100장면, 가람기획. 고태우 지음

5. 인터뷰: 전 로동당 비서 황장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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