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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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호위부대원은 왜 김정일에게 총을 겨누었나? 7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9 21:05




지난이야기 : 김일성이 위급하다는 보고를 받고 묘향산으로 직승기가 떠났지만 비바람 때문에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김정일은 경호원들도 모자라서 권총까지 휴대하는데.....



김일성이 위급한 순간에 김정일이 권총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생명의 위협을 느낄만한 어떤 일이 있었다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리유는 8년 뒤에 김정일의 입을 통해 드러납니다.



2002년 2월 김정일은 당중앙 선전선동부장 정하철, 중앙당 군사부 제1부부장 리용철, 조선인민군 총 정치국 국장 조명록, 인민군 대장인 현철해, 박재경 등 주요 간부들 앞에서, 자기의 세 번째 아내인 고영희에 대한 우상화 선전을 할 데 대해 지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김정일 : 우리 집사람은 충신 중의 충신입니다. 우리 집사람처럼 나를 아끼고 위해주는 혁명 동지는 없습니다. 나는 수령님 3년상을 치르는 전 기간 몸에 권총을 휴대하고 살았 는데, 그 총은 우리 집사람이 혹시 나쁜 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면서 나에게 아침저녁으로 쥐어준 것입니다.



그해 8월 조선인민군출판사에서 “존경하는 어머님은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께 끝없이 충직한 충신 중의 충신이다”라는 제목의 강연 자료가 발행됐습니다. 그 자료에는 김정일의 말을 뒷받침 해주는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해설 : 위대한 수령님께서 뜻밖에 우리 곁을 떠나시였을 때 있은 일, 그때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병상태가 위급하다는 급보를 받으시고 수령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급히 떠나게 되시였다. 존경하는 어머님께서는 즉시에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의 신변안전을 위한 강인하고 주도 세밀한 대책을 세우시였다. 사실 그때는 모두가 당황한 상태였기 때문에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존경하는 어머님께서는 복잡한 정황 속에서 나쁜 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하시면서 예측할 수 없는 불의의 정황에도 주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명 대책을 세우시여 혁명의 수뇌부를 백방으로 옹위하시였다.



김정일의 고백과 강연 자료에서 당시 그가 느낀 두려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심장마비로 김일성이 죽었다면 김정일이 이처럼 과민반응을 보일 필요가 있었을까요? 다시 1994년 7월8일의 상황으로 돌아가 봅니다.



김일성의 죽음이 확인된 순간 김정일은 자신의 경호를 담당하는 호위총국 2국에 비밀지시를 주었습니다.



국장 :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지시를 하달한다. 호위총국 1국을 철저히 감시하고 전투동원상태를 유지하라! 정세가 엄중하다.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를 목숨으로 호위하자!



전체 : 호위하자!



김일성의 호위를 담당했던 호위총국 1국 성원들에 대한 물샐 틈 없는 감시가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뒤 호위총국 1국의 군관 한 명이 김정일을 향해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총격전 과정에 김정일 경호원이 즉사하고 주변의 간부 하나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호위총국 1국 군관도 현장에서 즉시 사살됐습니다. 충격을 받은 김정일은 곧바로 호위총국 1국을 해산하고 1국출신 장령급 및 좌급 간부들을 모두 안기부 련루자로 몰아 청산했습니다. 그러고도 안심을 못했던지 정치적으로 우수한 수십만 명의 인원과 현대적인 무기들로 완전 무장한 호위사령부를 외면하고 무력부 보위사령부에 10처라는 신설 경호부서를 내오게 하여 거기에 자기 목숨을 맡겼습니다. 지금 이 10처는 보위사령부에서 떨어져 나와 국방위원장 직속 행사총국으로 승격되어 조선 최고의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국방위원장이기 때문에 군대가 응당 호위사업도 해야 한다는 군 수뇌부의 설명이 있었지만, 사실 그 리면을 들여다보면 김정일이 김일성의 충성파 인물들을 매우 두려워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김일성 측근들에 대한 숙청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김정일은 미공급 사태로 체제가 불안해지자 전쟁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잔인한 처벌을 계속했습니다. 물론 민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내부단속을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김일성 측근세력들을 제거하는 좋은 기회로 적극 리용했습니다. 서관히 간첩 사건과 그 이후 벌어졌던 ‘심화조’ 사건에서 김일성 측근 세력들이 무차별적으로 제거된 것을 보면 김정일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 분명해집니다.



김일성은 과로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이 죽자마자 ‘김정일이 김일성을 암살했다’는 소문이 평양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져나갔습니다. 지금까지 호위총국 1국 고급군관의 수기를 통해 ‘김일성 암살설’이 퍼지게 된 근거들을 살펴봤습니다.



확실한 것은 김정일은 권력을 잡기 위해 삼촌과 동생들마저 철저하게 짓밟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호위총국 1국 고급군관이 수기에서 ‘김정일은 권력이냐 혈육이냐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서슴없이 권력을 끌어안을 사람이다. 피가 식을 만큼 식어 종당에는 친 혈육애마저 거부하는 랭혈의 인간이다.’라고 평가한 것도 이런 전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총 일곱번에 걸쳐 진행된 <김일성 호위부대원은 왜 김정일에게 총을 겨누었나?>를 마치겠습니다.



<추적, 사건과 진실, 김일성 호위부대원은 왜 김정일에게 총을 겨누었나?>,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참고 및 인용자료>

1. ‘김일성 사망 직전 父子암투 120시간’, 신동아(p142 ~ 164), 2005.08.01

2. 「존경하는 어머님은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께 끝없이 충직한 충신 중의 충신이다」(강연자료, 2002년 8월, 조선인민군 출판사), 월간조선 200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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