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력사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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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과 5.16 군사정변

청소년을 위한 력사강좌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3




안녕하세요. <청소년을 위한 력사 강좌>의 장성무입니다. 오늘은 제32과 ‘5.16 군사정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5.16혁명공약>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강화한다. 둘째,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한다. 셋째,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품을 진작시킨다. 넷째, 인민생활의 고통을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기울인다. 다섯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키운다. 여섯째, 량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





지금까지 들으신 내용은 1961년 5월 16일, 서울에 입성한 군사정변 세력이 새벽 5시 방송을 통해 발표한 혁명공약의 내용입니다. ‘5.16혁명’이라 불리는 이 군사정변은 박정희 륙군 소장을 지도자로 하는 군부 핵심 장교들이 헌법 절차를 거쳐 수립된 남조선 정부를 불법적으로 전복하고 국가 권력을 장악한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5.16군사정변의 발생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들의 군사정변 조짐은 1960년 3.15 선거가 부정선거로 밝혀지면서 시작됩니다. 4.19 직후인 5월 초,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장교 8명이 3.15 부정선거를 방조하고 부정부패하며 무능한 군부 수뇌부의 사퇴를 촉구하는 문서를 돌리다가 발각된 사건이 발생합니다. 군부 내의 동정적인 여론으로 심한 처벌을 받지 않았던 이들은 같은 해 8월 장면 내각이 출범하자 신임 국방부 장관을 찾아가 같은 내용의 건의를 하려했으나 실패하고 맙니다. 이후 이들은 서울의 충무장이라는 음식점에 모여 개혁의 방식을 군사정변으로 바꿀 것을 결의하게 되는데 이 모임이 5.16 정변과 관련된 첫 모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 군부에서 청렴함으로 인정을 받고 있던 부산지구의 군수기지사령관인 박정희 륙군 소장을 지도자로 추대하고 세력을 결집시켰습니다. 이들의 정변 계획은 4.19 혁명 이후 집권한 민주당 정부의 무능과 정치적 혼란 그리고 미국의 원조가 줄어들면서 악화된 경제상황 등으로 탄력을 받습니다. 그러나 거사 계획이 루설되면서 군대 내부와 주변에 소문이 나돌았고 정변 모의자 색출이 시작되자 이들은 계획보다 빨리 정변을 최종 결정하고 작전 계획에 들어갑니다. 정변이 결행되기 불과 몇 시간을 앞두고 또다시 그 비밀이 루설되자 륙군참모총장 장도영은 5월 15일 이 쿠테타 주동자의 체포를 명령합니다. 하지만 정변 세력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헌병차감은 박정희에게 설득되여 결국 체포를 포기하고 맙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경 한강에 도착한 해병대와 공수단, 제23사단은 서울 진입을 막는 헌병들과 총격전을 벌리며 서울에 입성합니다. 정변 세력은 같은 날 오전 9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오후 7시 정권 인수를 발표합니다. 장면 총리는 정변이 발생하자 몸을 숨긴 채 미군에 진압을 요청하였고, 장면 총리와 정치적으로 대립한 윤보선 대통령은 정변 지도부를 만나 사실상 이를 용인합니다. 또한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 대장이 군사정변 반대 성명을 발표하지만, 미국 정부도 사실상 이를 묵인하는 자세로 돌아섭니다.

이렇게 하여 남조선에는 군사정변에 의해 장면 총리와 윤보선 대통령을 지도자로 한 민주당 집권은 마감되고 2년 7개월간에 걸친 군사정부의 실질적인 집권이 시작되게 됩니다.



<청소년을 위한 력사 강좌> 제32과 ‘5.16 군사정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다음 이 시간에는 제33과 ‘남조선의 군사정부 시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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