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일남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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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부 나의 어린 시절

리일남 수기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3




다시 내 이력을 소개해 보기로 하자. 평범하던 생활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추적하는 것이 김정일 왕족의 실상을 알려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 후 평범한 가정을 꾸몄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경림동 집은 흔히 볼 수 있는 아빠트였다. 양쪽 끝에 공동화장실이 있는 복도식 아빠트였는데, 부엌 하나에 방 하나로 8평 정도 됐던 것 같다. 내가 태어난 외가는 부엌까지 합해 10평 정도 되는, 평민들 것보다 조금 나은 아빠트였다.



아버지는 65년 함흥에 있는 국방과학원 핵물리 연구실 연구원 겸 국방대학 물리수학 교수로 가셨다. 과학원에 계실 때 아버지는 민간인 신분이었는데, 국방과학원으로 가시면서 소좌로 임명되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직장을 옮기시면서 어머니도 과학원 내에 있는 과학원출판사의 ‘물리수학’ 편집부 기자로 자리를 옮기셨다. 아버지는 68년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군에서는 당시 아버지의 사인을 교통사고라고 했으나, 뒤에 핵인지 미사일인지 모르지만 무슨 실험을 하다가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나와 어머니, 그리고 이모가 함흥으로 가 장례식에 참석했다. 아버지는 함흥 본궁에 있는 인민군렬사묘에 묻히셨다.



혜림 이모는 나를 예뻐했다. 공적인 자리, 사적인 자리에 나를 많이 데리고 다녔다. 영화촬영소 배우들끼리 야유회 갈 때 따라간 게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 덕분에 나는 영화배우를 많이 알게 됐다. 이모가 우리 집에 오면 아버지 없이 자라는 내가 불쌍하다고 나를 껴안고 주무시곤 했다. 어렸을 때 이모는 내게 엄마 같은 분이었다.



1968년 9월 1일 나는 대동문 인민학교에 입학했다. 다음 해에는 소년단에 입단했다. 나는 대표로 뽑혀 김일성 생가가 있는 만경대의 만경대혁명학원 운동장에서 입단식에 참석했다. 한 반은 대개 45명 정도였는데, 우리 반에서 두 명만 특별대우를 받았다. 나와 김일용이라는 동무였는데, 나는 아버지가 인민군 렬사묘지에 묻힌 유자녀였고, 김일용은 ‘영예군인’ 자녀였다. 일용이 아버지는 고위 군관으로 6.25 때 다리가 절단됐다.



특별대우란 게 별 건 아니다. 1년에 두 번, 즉 김일성의 생일인 4월 15일과 공화국 창건일인 9월 9일에 공책 등 학용품을 받는 것이다. 명절 때면 선생님이 국가에서 내려온 학용품을 주었다. 일반 상점에서는 팔지 않는 지우개 달린 연필이나 공책 등이었는데, 다른 학생들의 박수를 받으면서 학용품을 받는 것은 어린 마음에 대단한 영광이었다.



인민학교 시절에는 이런 정도 외에는 특별히 인상에 남는 게 없다. 다만 인민학교 다닐 때 이사간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69년에 같은 경림동에 있는 다른 아빠트로 이사갔다. 그 아빠트는 복도식이 아니고, 계단을 중심으로 한 층에 세 세대씩 배치돼 있었다. 당시에는 그곳으로 배치된 것이 우리가 인민군 렬사가족인 탓으로 알고 있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때는 혜림 이모가 김정일과 연애하던 시절이라 뒷심이 서서히 형성되던 시기였기 때문인 것 같다. 결국 이모가 주선해서 좋은 집으로 이사간 것 같다.



이사간 집은 문화인 아빠트인데, 6.25 조선전쟁 후 로므니아 사람들이 지어준 아빠트였다. 전쟁이 끝나자 소위 사회주의 형제 나라들이 조선에 원조를 하고 각종 건물을 지어주었는데, 그 아빠트도 그런 식으로 지어진 것이었다. 새 아빠트는 집집마다 화장실이 있고 방도 세 칸짜리였다. 한 20평 정도 됐던 것 같다. 문화인 아빠트에는 북조선으로 넘어간 후 고위직을 지낸 소설가 홍명희의 딸이 살고 있었다. 문화인 아빠트에 살던 홍명희의 딸이 홍일천, 나는 그 분을 영주 엄마라고 불렀다. 아들이 나와 인민학교 동창인 박영주였기 때문이다. 영주의 아버지, 그러니까 홍명희의 사위는 법의감정원 원장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문화인 아빠트에는 영주네뿐만 아니라 홍명희 가족들이 많이 살았다. 조선 사회과학원 원장을 한 맏아들 홍기문도 거기에 살았고, 홍기문의 아들 홍석태도 그 아빠트에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문화인 아빠트는 국장급 아빠트는 됐던 것 같다.



해설 : 홍명희는 남조선에서 더 유명한 사람이다. 남조선 충청북도 괴산 출신으로 1948년에 북조선으로 넘어 갔다. 일제시대에는 항일운동을 벌였으며, 유명한 소설인 ‘임꺽정’을 집필했다. 북조선에서는 내각수상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직위를 가졌다. 현재 남조선에서는 그가 문학에 기여한 것을 기려 그의 이름을 딴 문학축제를 벌리고 있다. 월남자 가족들을 탄압하는 북조선과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69년 당시 그 아빠트에 텔레비죤이 있는 집이 없었다. 이모는 우리가 이사를 오자 쏘련제 ‘땜쁘’라는 흑백 텔레비죤을 보내줬다.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내가 대동문 인민학교를 졸업할 때인 1972년에는 이모가 이미 김정일의 장남인 정남을 낳았을 때였다. 이모가 김정일의 부인이 되고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안 것은 1976년 내가 모스끄바로 류학 가기 직전이었다.



첫 결혼에 실패한 이모는 우리 집에 계셨는데, 가끔 시커먼 쏘련제 자동차 볼가가 이모를 태우고 가던 기억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어머니도 자주 볼가를 타고 어딘가에 다녀오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우리 집에 자주 오시던 외할머니의 얼굴 보기도 힘들어졌다. 할머니께서 어디 가셨냐고 물으면 출장 가셨다고 했다. 당시는 그러려니 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할머니는 당시 갓 태어난 정남이를 돌보고 계셨다.



해설 : 김정남의 존재를 밝힐 수 없었던 김정일은 성혜림의 가족들을 불러들여서 김정남을 키우고 교육했다. 가장 먼저 리일남의 외할머니가 들어갔고 몇 년 뒤 리일남의 어머니 성혜랑이 김정남의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성혜랑의 수기를 잠시 살펴보자.



성혜랑 :어머니는 정남이가 두 달이 되자 곧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 아이를 도맡아 길렀다. 승용차 ‘질’의 옆 뒤 창은 짙은 청색 천으로 가려져서 밖에서도 들여다보이지 않고 안에서도 내다보이지 않는 차였다. 어머니가 아이를 그 차에 태우고 병원을 다니실 때 이 불쌍하게 태여난 손자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지 어머니의 마음은 언제나 어두우셨다.



72년 대동문 인민학교 졸업을 얼마 앞두고, 김정일의 중성동 관저에 사시던 이모가 집에 찾아왔다.



성혜림 : 일남아, 이제 중학교에 가야 하는데 너 가고 싶은 데를 얘기해 봐라. 네가 가고 싶은 곳에 보내주겠다.



리일남 : 정말이야요.



성혜림 : 정말이지. 만경대혁명학원도 좋고, 평양외국어학교나 금성고등중학교도 니가 원하면 어디든 보내주마.



세 학교는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간부들 자녀 아니면 입학을 생각하지도 못하는 곳이다. 만경대혁명학원도 그렇지만 평양외국어학교도 졸업하면 류학 기회가 주어지고 외교관으로 나가게 되기 때문에 아무나 못 간다. 김일성의 젊을 때 이름을 딴 금성고등중학교 도 역시 보통 배경이 아니면 갈 수 없다. 아빠트에서도 “쟤, 금성고중 다닌데.” 하면 “아 그래?” 하면서 부러워하는 곳이다. 이 세 학교 중에서도 나는 만경대혁명학원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만경대혁명학원 학생들은 군복을 입는데, 그게 멋있게 보였기 때문이다. 리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미 이모의 힘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만경대혁명학원에 가게 될 것으로 알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입학 소식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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