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일남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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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부 김정일 왕족을 위한 시설들

리일남 수기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3




계속 관저 이야기가 나왔으니 오늘은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의 관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겠다. 먼저 얘기할 게 ‘5호댁’이다. 해방되고 김일성이 평양에 입성한 뒤 처음 살았던 곳이 ‘5호댁’이다. 96년 초 북조선 사회안전부 소속 군인이 총기 난동사건을 일으킨 로씨야대사관 길 건너에 있는 언덕 우의 집이다. 김정일과 김경희도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곳은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이 운명한 곳이기도 하다.



관저의 력사는 이처럼 평양시 중심가에 있는 5호댁부터 시작된다. 김정일의 어릴적 쏘련식 이름이 유라였기 때문에 5호댁에서는 유라 동지라고 했다고 한다. 김경희와 김정일 사이에 있었던 김일성의 둘째 아들 슈라가 5호댁 연못가에서 놀다가 빠져 죽었다. 김일성 가족들은 6.25가 끝나고 그 집을 증축해서 계속 살았다고 한다.



해설 : 김정일은 자신이 백두산 밀영에서 태여났다고 선전하고 있지만 로씨야 하바로프스크가 출생지다. 김일성이 일제의 공격을 피해 로씨야로 들어가서 김정일을 낳은 것이다. 김정일은 1945년 11월 어머니 김정숙을 따라 평양에 들어왔다.



75년경 지금 주석궁 뒤쪽에 흥부 초대소가 있었는데, 그 뒤편에 새로 관저를 지었다. 흥부 초대소는 국가원수들이 왔을 때 사용하는 영빈관이다. 새 관저는 33호 관저로 불렀는데, 그때부터 5호댁은 31호로 부르게 됐다. 31호 관저는 력사적 건물이라 명칭만 바꿔 보존하고 있다. 나중에 33호 관저 앞에 본관을 지었다. 남조선에서는 본관을 ‘주석궁’이라고 부르는데, 공식명칭은 ‘금수산 의사당’이다. 입법을 관장하는 기관의 청사 이름이지만, 최고인민회의와는 관계없는 김일성의 집무실이었다.



호화로움과 규모, 그리고 사용하는 사람을 생각한다면 남조선에서 부르는 주석궁이 맞는 용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호위사령부 등 측근들은 ‘주석부’라고 불렀다. 주석궁은 76년에 완공됐다. 김일성은 주석궁이 완공되기 전에는 현재 김정일이 집무하는 중앙당 본청사에서 아들과 함께 근무했다. 김일성이 주석궁으로 들어가자, 김정일은 중앙당 본청사를 개조해서 자신의 집무실로 만들었다.



해설 : 지금 김정일이 혼자 쓰고 있는 본청사에는 원래 중앙당 일꾼들이 다 들어가 일을 했다. 이 본청사를 김정일이 호화롭게 꾸려 개인 집무실로 만든 것이다. 이외에도 김정일은 큰 규모의 청사를 10여 개 동이나 더 짓도록 하면서 국가재산을 마음껏 탕진했다. 이와 함께 중앙당 일꾼들의 수를 대폭 늘려 당 기구를 마구 확대했는데, 이들은 당과 인민들의 숨통을 조여 김정일 독재체제의 기반을 다지는데 리용됐다.



김정일의 집무실은 3층짜리 건물이다. 집무실에 가본 적이 있어 구조를 잘 안다. 79년 2월16일 김정일의 생일 행사를 마치고 난 직후였다.



김정일 : 정남아! 빠빠가 일하는 집무실을 새로 증축했는데 구경시켜 줄까?



김정남 : 와, 재밌겠다. 빠빠.. 빨리 가자!



김정일 : 일남아, 너도 같이 가자.



우리가 살고 있는 15호 관저에서 김정일의 집무실까지는 지하도로 련결되여 있다. 승강기를 타고 지하로 1백미터 정도 내려가면 집무실과 통하는 지하도가 나온다. 김정일은 운동 삼아 걸어가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한다. 지하도는 대리석으로 돼 있는데, 폭은 4-5m가량 되고, 높이는 3m 정도 된다. 걸어서 가면 6분쯤 걸린다.



김정남 : 와--- 빠빠! 대단하다.

김정일 : 미제놈들이 아무리 폭격해도 끄떡없겠지. 자 다 왔다. 올라가자.



집무실 3층은 전체가 김정일 전용시설이다. 2층은 측근 부부장 20여 명의 집무실인데, 한 사람에 방 하나씩 배정돼 있다. 1층에는 서기실이 있는데, 전속타자수가 10명 정도 됐다. 타자수들은 김정일에게 올라오는 보고서를 다시 쳐서 올리는 일을 한다. 김정일이 읽기 쉽고 피곤하지 않게 큰 글자로 다시 친다.



김정일 : 자 이리들 오너라. 여기가 빠빠 집무실이고, 저기는 소회의실이다.



김정일은 휴식실과 식당을 차례로 보여준 후 대회의실로 들어갔다. 대회의실에 들어가자 김정일은 자신이 앉는 중앙의 자리를 가리키며 정남이에게 말했다.



김정일 : 정남아, 저기 가서 앉아봐라.



정남 : 알았다 빠빠.



김정일 : 정남아!, 이 다음에 네가 커서 큰소리 칠 자리다. 빠빠 자리에 앉아서 마이크에다 빠빠 이름을 불러봐라.



정남 : 김정일 동무, 일어서시오!



김정일 : 예, 김정일 일어섰습니다.



정남 : 리일남 동무, 일어서시오.!



리일남 : 예, 리일남 일어섰습니다.



정남 : 와, 재밌다. 우리 다시 하자

.

전체 : 정남아 이제 다른 데로 구경가자. 여기서 조금만 더 놀다 가자 빠빠.....



김정일의 집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겠다. 김정일의 집은 중성동 15호 관저가 처음이다. 그 전에는 5호댁에서 살았다. 70년에 중성동에 조그맣게 집을 지어 이모와 동거를 시작했다. 중성동 관저는 이후 몇 차례 증축 공사를 벌린다. 원래 건평 1백 평 규모였던 중성동 관저는 73년도에 5백 평 규모로, 그리고 78년 1년 간의 공사를 거쳐 지금의 2천 평 규모로 증축됐다. 증축 공사중에는 동평양 관저로 불리는 85호 관저나 창광산 관저에서 생활했다.



동평양 관저는 대동강변에 있다. 부근에 외교부초대소, 인민무력부초대소가 있는데, 경치가 뛰어나다. 동평양 관저는 전체 면적이 중성동 관저보다 훨씬 넓다. 정문을 통과해서 한참 가야 건물이 나오는데, 울타리와 울타리 사이에서 사슴이 뛰어 논다. 백두산에서 잡아온 사슴들이다. 그리고 현관까지 가는 도중에 연못도 있고 낚시터도 있다. 또 동평양 관저에는 인공폭포도 설치해 놨다. 백두산, 금강산에서 갖다 놓은 바위들을 쌓아 놓고 폭포를 만든 것이다.



김정일은 창광산 관저나 85호 관저에도 자주 갔다. 나는 79년 창광산 관저에 처음 가봤는데, 그 직후 창광산 관저는 고영희한테 넘어갔다. 그러니까 김정일은 79년부터 고영희와 동거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85호와 15호 관저 두 개를 사용했다. 두 관저에는 내 침실이 있었다. 김정일은 또 보통강구역 서장동에 관저를 가지고 있다. 서장동 관저는 못 가봤는데, 규모가 아주 작다고 알려져 있다.



나는 김경희의 관저도 가봤다. 창광산 관저 밑에 있는데, 규모가 5백 평 정도였다. 역시 2호위부에서 경호하고 있었다. 중성동 관저 옆에 있는 우리 집은 3백 평 규모였다가 내가 서울에 온 후 또 증축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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