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일남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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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부 김정일과 김성애의 권력 투쟁

리일남 수기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3




김정일의 생모이자 김일성의 본처 김정숙은 1948년에 세상을 떠났다. 내게 김정숙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사람이 초대 경위련대장 강상호의 부인이다. 강상호의 아들이 만경대혁명학원 동창인 강문국이었다. 요즘식으로 얘기하면 문국이 엄마는 당시 경호실장 부인인데, 김일성이 처음에 살던 5호댁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내가 문국이 집에 놀러 가면 “김정숙 녀사와 친하게 지냈다.”면서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다.



당시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가 김일성과 동행하면서 찍은 사진도 봤다. 머리를 양쪽으로 따고 있었는데, 참 예쁜 얼굴이었다. 김성애는 김일성의 녀비서였다. 김일성과 김성애가 좋게 지내는 걸 김정숙이 눈치채고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김정숙이 아이를 낳다가 숨졌다는 얘기도 있지만, 병을 앓았다고 한다. 의사에게 병을 보였지만 그때 의술로는 고칠 수 없었다.



김일성이 바로 재혼할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6.25전쟁 등으로 재혼할 시기도 아니었을 것이다. 주변에서 재혼 얘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부수상 김일, 6.25전쟁 때 전선총사령관을 지낸 북조선의 2인자였던 김책,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강건, 민족보위상(지금의 인민무력부)최용건 같은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그때 김일성과 김성애가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측근 장군들이 다 알고 있었다.



김일성과 김성애는 6.25전쟁이 끝나기 전인 52년부터 본격적으로 같이 살았다고 한다. 53년에 딸 경진이가 태어났고, 55년에 평일이, 그리고 57년에 영일이가 태어났다. 남조선의 일부 언론에서는 김일성과 김성애 사이에 성일이란 아들이 또 있다고 하는데, 그건 틀린 보도다.



김성애는 52년도부터 정식 부인이 됐지만,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다. 당시는 전쟁중이라 결혼식을 할 형편도 아니었다. 김성애는 60년대 중반부터 조선녀성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았다. 위원장은 김옥순이라고 최광의 안해이자 항일 빨찌산 출신이었다. 죽은 김정숙과 같은 여자 빨찌산 동료였다.



69년에 김성애가 녀맹위원장이 되면서 녀맹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녀맹 간부들이 해외에 나가면 대사가 마중 나올 정도가 됐다. 그리고 김성애 녀맹위원장의 우상화작업이 시작됐다. 여러 화보에 김성애 위원장이 녀맹의 한계를 뛰어넘어 각 기관 기업소를 현지 지도하는 사진이 나오고, 김성애 녀맹위원장에 대한 책자도 나왔다. 김성애의 사진이 김일성의 사진과 똑 같은 크기로 신문과 방송에 소개되었다. 상대적으로 김정숙이 격하되기 시작했다.



해설 : 당시 보도기관들이 김성애의 말을 ‘교시’로 처리하는 등 혼란에 빠질 정도로 김성애의 위상이 높았다. 이것은 김일성이 농업대회 공개회의에서 ‘김성애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김성애의 지시는 나의 지시와 같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수령의 교시를 등에 업은 김성애는 김영주와 김정일을 제치고 자신의 첫아들인 김평일을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세력을 넓혀나갔다.



1970년대 초부터 김정일이 ‘당중앙’으로서 서서히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65년 대학 졸업 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지도원으로 출발, 70년 과장을 거치지 않고 바로 선전선동부 문화예술부분담당 부부장이 됐다. 72년에는 선전선동부 부장을 맡는다. 이런 때 친어머니가 상대적으로 격하되고, 녀맹의 위세가 커지는 것을 보고 김정일이 아버지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고 한다.



김정일 : 수령님! 김정숙 동지는 항일 빨찌산 시절부터 수령님을 보필해 오다가 해방 후 돌아가셨는데, 이 분이 조선 녀성들의 귀감이 되실 분입니다. 이런 분이 인민들에게 알려져야지 어떻게 녀맹의 김성애 위원장이 좌지우지할 수 있습니까?



해설 : 김정일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정일도 김일성의 분노를 살 위험이 있어서 김성애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대신 김정일은 매제인 장성택을 불러 극비리에 김성애의 뒷조사를 지시했다. 그러는 가운데 1973년 ‘인민대학습당 부지’ 사건이 터졌다. 김일성이 인민대학습당을 지으려고 아껴둔 곳에 개인저택이 지어져 있었는데, 김성애의 동생인 김성갑이 연루되어 있었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과 김성애 사이에 결정적인 틈이 벌어졌고, 김정일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그동안 모아둔 자료를 가지고 김일성을 찾아 갔다. 리일남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자.



김일성이 김정일의 항의를 받아들인 직접적 원인은 김성애의 동생 김성갑의 월권이었다. 김성갑은 당시 평양시당 조직비서였는데, 누나의 위세를 등에 업고 군과 당의 요소요소에 자기 세력을 부식시켜 놓고 있었다. 원래 시당에서는 책임비서가 1인자고, 조직비서는 2인자인데, 평양시당의 2인자가 전국을 말아먹는 형국이었다. 당시 김성갑의 권세는 누구도 넘나볼 수 없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김정일이 이런 상황을 김일성에게 직보하면서, 김성애와 김성갑이 요소요소에 측근들을 박아 놓은 것을 유일사상 체제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말했다고 한다.



김일성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유일사상 체제로 모든 인민이 똘똘 뭉쳐야 하는 판에 부인과 그 동생이 판을 친다는 것은 김일성에게도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김일성은 1973년 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국 회의를 소집, 유일사상 체제에 도전하는 행위는 엄단한다는 방침을 단호하게 발표한다. 당시 김정일은 선전선동부장 겸 비서로 회의에 참석했다. 김일성은 녀맹의 조직을 격하시키고, 김성애에게 모든 대외적 행사에 나오지 말라고 지시했다.



해설 : 이 사건으로 김성애의 남동생들인 김성갑과 김성호는 직위해제되여 연금상태에 들어갔다. 그리고 김성애, 김성갑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김성애 일파를 몰아낸 김정일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모든 싹을 자르기 위해서 이른바 ‘곁가지’ 투쟁을 본격적으로 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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