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이 살 길은 개혁개방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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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모이 정책 2

북한이 살 길은 개혁개방뿐이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2-09-17 18:27

사회 : 이번 순서는 ‘조선인민이 살 길은 개혁개방 뿐이다’ 시간입니다. 수령 독재를 반대하는 량심적인 간부들, 그리고 조선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청년학생들과 함께, 개혁개방의 구체적인 방도를 살펴봅니다. 우리는 지금 중국에 이어서 윁남의 개혁개방 경험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네 번째 순서인데요. 도이모이 정책 추진 과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도움 말씀에 윤성호 방송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윤 : 네, 안녕하십니까?



사회 : 지난 시간에는 도이모이 정책의 1단계 진행 과정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2단계 과정과 경제개혁의 주요 내용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 갖기로 했었는데요. 먼저 도이모이 2기는 언제부터 시작됩니까?



윤 : 1994년부터 시작되는 경제개혁을 도이모이 2기 개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90년대 초반 경제개혁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요. 우선, 농민과 기업소들이 소득이 늘어나자, 국가에 바치는 세금도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되자 자연히 국가에서 무턱대고 찍어내던 돈을 찍지 않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식량을 비롯한 생활필수품 가격도 안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윁남 공산당 지도부는 1기 개혁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보고 이를 더욱 가속화하는 2기 개혁을 시작한 것이죠.



사회 : 개혁조치를 발표한 구체적인 시점은 언제입니까?



윤 : 1994년 제7차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공식적으로 개혁조치를 발표하게 됩니다. 이때 발표된 대략적인 내용은 공업화를 더욱 촉진하고 경제 근대화 노선을 확고히 견지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사회 : 공업화와 근대화를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하게 된 것입니까?



윤 : 1996년 제8차 당대회에서는 공업화․근대화 목표를 제시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세부 방침을 정하게 됩니다. 우선 공업화와 근대화의 목표를 “2020년까지 윁남을 공업국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분투한다”고 정했습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국영기업의 주식회사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인민경제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부문만 국영기업으로 남겨 두고 나머지 기업소들은 민간 기업으로 만든 것입니다.



사회 : 주식회사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윤 : 주식회사라는 것은 시장경제 기업소의 일반적인 소유 및 운영 형태 기업소를 말하는 데요. 시장경제 사회의 기업소들은 보통 주식이라는 기업소의 소유증서를 발행합니다. 보통 이 증서를 돈을 받고 판매하게 되는 데, 이 증서를 사면 그 기업소에 대한 소유권을 갖게 됩니다. 기업소의 크기에 따라 주식매수가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한데요. 주식을 많이 가질수록 그 기업에 대한 소유권이 더 크고, 적게 가지면 기업에 대한 소유권도 적어지죠. 이 주식회사 제도 때문에 시장경제 사회의 기업소는 국가나 특정 개인이 기업소를 소유하지 않고 여러 사람이 소유권을 나누어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 : 그렇군요. 소유는 민간에게 나누어 준다고 하셨는데, 기업소 운영은 어떻게 했습니까?



윤 : 민간기업소는 당연히 민간에서 기업소를 경영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국영기업인데요. 국영 기업의 경우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소유는 국가가 하고 있는 기업이라도 경영은 개인과 민간경제조직에 일정기간 맡기는 제도를 실시했습니다. 관료들보다 기업경영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또 기업소를 운영한 경험도 있는 사람들이 기업소의 경영을 맡게 한 것이죠.



사회 : 그렇군요. 이제 경제 개혁의 주요 내용을 좀 살펴볼까요? 먼저 가격정책의 개혁부터 알아보죠. 우선, 당시 윁남에서는 물건값이 너무 높아 인민생활이 어려웠던 때였다고 알고 있는데요. 가격을 내리기 위해 윁남정부는 어떤 대책을 세웠습니까?



윤 : 생산력이 낮다보니, 물건이 부족하고, 국가에서는 모든 기업소를 운영하기 위해 돈을 마구 찍어 대다보니, 가격이 폭등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요. 윁남 정부는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돈 찍어내기를 중단하고, 기업소에 대한 국가보조금도 줄였습니다. 민간이 알아서 자주적으로 기업소를 운영할 수 있게 한 것이죠.

그렇게 되자 정부가 무리하게 돈을 찍어내지 않아도 되었고, 인민들이 자주적 창조적으로 기업소를 운영하게 되면서 생산력도 높아졌습니다.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물건 가격도 내리게 되었습니다.



사회 : 보통 사회주의 경제에서 가격은 국가가 일일이 매기지 않았습니까? 윁남은 경제개혁이후 어떤 식으로 가격을 정했습니까?



윤 : 1987년 각료회의 217호 결정으로 정부 통제 품목을 제외한 대부분의 물건 가격을 시장에 맡겨서 자유화했습니다. 장마당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과 물건을 사는 사람이 흥정을 해서 물건 값을 정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사회 : 그렇군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물건을 파는 사람은 가격을 무작정 높이려고 할 것이고 물건을 사려는 사람은 무조건 깎으려고 들 텐데. 물건 가격을 정하기가 더 어렵지 않겠습니까?



윤 :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가격 자유화 초기에는 그와 같은 현상이 나타날 수 있겠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면 적정 가격을 찾아갑니다. 물건을 파는 사람이 가격을 터무니없이 높이면, 물건을 사려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물건을 팔아 돈을 벌어야 되는 데, 돈을 벌 수없게 되겠죠. 어쩔 수 없이 물건을 파는 사람은 가격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죠. 결국 시간이 지나면 물건은 적정한 가격을 찾게 됩니다.



사회 : 가격 자유화 정책은 한꺼번에 실시한 것입니까?



윤 : 앞에서 말씀 드렸습니다만, 국가에서 소유한 주요 산업의 가격은 우선 제외됐습니다. 1989년 말까지 전력, 수도, 교통, 통신, 철강, 시멘트는 국가에서 가격을 정했구요. 그 이외 품목은 모두 자유화했습니다.



사회 : 기업소에서 사용하게 되는 에네르기나 원자재 같은 경우에는 가격을 어떻게 했습니까?



윤 : 1993년까지는 에네르기, 수송비, 수입하는 원자재 가운데 일부를 대상으로 국가통제가격제도를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1993년부터는 이들에 대한 국가통제가격도 거의 폐지했습니다.



사회 : 농산물 가격도 자유화되는 것입니까?



윤 :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농가계약제가 실시됩니다. 그에 따라 그 이전까지 실시해오던 관리가격체제가 협의가격체제로 전환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농산물 가격도 사실상 시장가격으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사회 : 경제개혁을 실시하고 개방을 하게 되면, 윁남 화폐 가치가 급속하게 떨어졌을 것 같은데요? 이에 대해서는 어떤 대책을 세웠습니까?



윤 : 윁남은 딸라를 비롯한 외화자금을 합리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1988년 10월 외환관리규정을 제정했습니다. 당시, 윁남 돈은 화폐가치가 급속하게 떨어지고 있던 때였습니다. 또 공식환율과 시장환율의 차이가 너무 커서 정부가 외화를 규제하고 싶어도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기업소와 개인들은 윁남 화폐를 전부 딸라로 바꿔 놓고 밖에 내놓지는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윁남 정부는 1991년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아 하노이와 호치민에 외화거래를 조절하는 외환거래서를 세웠습니다.

그때부터 공식환율과 암시장 환율의 차이가 크게 줄어들기 시작했구요. 자연스럽게 윁남돈과 딸라의 환율도 시장가격에 따라 자연스럽게 결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 : 그렇군요. 농업관리분야에서는 어떤 식으로 개혁을 실시했습니까?



윤 : 1981년 1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최종생산물계약제도’라는 것을 내놓았습니다. 이 제도는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해 주고 계약생산량을 초과한 수확분은 농민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습니다.

개별농가가 기본적 생산단위가 되고 종전 생산단위였던 합작사는 비료 및 농약의 공급, 관개정비 사업을 담당하는 식으로 역할을 나눴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시간에도 잠깐 말씀을 드렸었는데요. 그러나 초기에는 정부가 너무 많은 땅을 분배하는 바람에 농민들이 국가로부터 받은 땅을 협동조합에 되돌려주기도 하고, 성과도 크게 나지 않았습니다.



사회 : 초기에 성과가 나지 않았던 것은 어떤 문제 때문이었죠?



윤 : 토지사용기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이었죠. 농민들이 땅을 자신의 것처럼 아끼고 땅심을 높이기 위해 거름도 하려면 토지사용기간이 충분히 길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윁남정부는 1987년 ‘신토지법’을 제정하여 개별농민의 토지사용권을 장기적으로 안정적으로 보장해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농민들은 농업생산과 농지개량, 땅심을 높이기 위한 퇴비 등을 열심히 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농업생산량도 늘어났습니다.



사회 : 농지 분배는 어떤 기준에 따라 진행했습니까?



윤 : 1988년 4월 농업경제관리의 쇄신에 관한 정치국 제10호 결의가 발표되면서 농지 분배의 원칙이 세워졌습니다. 일단, 농지의 일부는 가족 수에 비례하여 분배했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남는 땅이 있으면, 나머지는 더 분배받고 싶은 농민들이 분배가격을 정해 농장에 신청하면 그것에 따라 토지분배량을 결정하는 입찰방식 생산계약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사회 : 농산물 수출은 언제부터 할 수 있게 된 것입니까?



윤 : 개혁 이전 윁남 정부는 식량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농산물 수출을 금지해왔습니다. 그러다 농업 개혁이 실시되고 농산물 판매와 가격을 자유화하면서 농산물 수출도 허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윁남 농민들은 더 비싼 값에 농산물을 수출할 수 있게 되면서 더 많은 돈을 벌게 된 것이죠.



사회 : 그렇군요. 네 지금까지 윁남 공산당의 도이모이2기 개혁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시간부터는 윁남의 농업개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 갖겠습니다. 윤성호 방송원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윤 :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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