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일남 수기

  • 방송정보 | 종영방송
  • 출연진행:

공식 SNS

제33부 모스끄바 생활

리일남 수기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3




혜림 이모의 숙소는 레닌스키 프로스펙트 울리짜 바빌로바, 즉 레닌대로 바빌로바가 85번지의 아빠트였다. 비행장에서 한 시간 가량 걸렸는데, 쏘련주재 외교관들이 사는 외교관 아빠트 단지 내의 조선 소유 아빠트였다. 외교관 아빠트에는 15층짜리 세 개동이 있었다. 84번지에서 86번지까지 각 동이 하나의 번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각 층마다 다섯 가구가 있었다. 조선 대사관 소유는 3층의 전부와 1층, 2층의 한 가구씩이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내 침실까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내 침실은 정남이 고모 김경희가 모스끄바 류학 때 쓰던 방이라는데, 이모 옆방이었다. 이모는 3층의 다섯 개 집을 다 썼다. 한 집은 대개 거실과 방 3개, 부엌과 위생실로 되어 있다. 남조선식으로 말하면 아빠트 한 가구다. 그러니까 이모는 3층에 있는 다섯 가구분을 혼자 다 쓴 것이다.



2층에는 조명호 모스끄바 대사관 당비서가 살고 있었고, 1층은 운전수와 최준덕 부부장이 사용하게 되었다. 조명호 당비서에게는 나와 동갑인 조상근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모스끄바에 있을 때 친하게 지냈는데, 로씨야어를 전혀 못했던 나의 모스끄바 생활 초기에 안내인 겸 통역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튿날부터 본격적인 모스끄바 생활이 시작됐다. 이모와 모스끄바 시내에 있는 여러 명소를 찾아 다녔다. 레닌묘도 보고 소년궁전, 웨덴하에 있는 공업농업전람관도 구경했다. 또 이즈마일로프스키, 아르항겔스크 공원에도 가보고, 똘스또이의 생가와 고리끼 생가도 가 보았다.

관광이 어느 정도 끝나자 이모가 나에게 말했다.



성혜림 : 일남아, 이제 여기서 생활하려면 쏘련말을 배워야 하지 않겠니?



리일남 : 예. 그런데 이모, 어떻게 배우지요? 한 번도 외국말을 배워본 적이 없는데....



성혜림 : 그건 걱정하지마라. 넌 아직 어리니까 금방 배울거야. 우선 소년단 야영소에 참가해서, 쏘련 친구들도 사귀고 말도 배우렴.



당시 이름은 잊었지만, 한 조선 공장과 쏘련 공장이 친선을 맺고 있었는데, 쏘련 공장에 소년단 야영소가 부설돼 있었다. 마침 여름방학 때라 조상근과 같이 15일 과정의 야영에 참가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그런대로 재미있었지만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홀레브라고 하는 로씨야식 검은빵에다 빠다(버터)가 나오는데 노린내가 나서 먹을 수 없었다. 외국에 나왔으니 그 나라 음식 먹는 것도 습관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억지로 먹으며 버티려 했는데, 한 주일이 지나니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같은 또래 로씨아 청소년들과 같이 생활하며 말도 배우고 그들의 생활 모습을 배우는게 앞으로 생활에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음식이 입에 안 맞아 거의 굶다시피 했다. 배가 고파서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여름인데도 추워서 견딜 수 없었다. 아무리 위도가 높다해도 평양식의 여름 날씨를 예상하고 옷을 준비해 간 나에게는 가을 날씨 비슷한 그곳의 아침 저녁은 견디기 어려웠다.



성혜림 : 여보세요.



리일남 : 이모!



성혜림 : 그래, 일남아! 잘 지내고 있니?



리일남 : 아니요. 여기서 나온 음식은 노린내가 나서 먹지도 못하겠어요. 그리고 어찌나 추운지.... 이모 더는 못 있겠어요. 나 좀 제발 데리고 가 달라요....



성혜림 : 그렇게 견디기 힘드니?



리일남 : 네, 이모. 말 배우는 건 고사하고 너무 힘들어요.



성혜림 : 그래, 알았다. 내 인차 사람을 보낼게.



이모의 부관이자 중앙당 직속 부부장인 최준덕 아저씨가 소년단 야영소까지 와서 상근이와 같이 모스끄바로 돌아 왔다. 일주일만에 끝난 반쪽짜리 야영이었다.



비록 금세 끝난 야영이지만 나름대로 추억도 있었다. 나는 소년단 야영소에 가면서 미국산껌 두 상자를 가지고 갔다. 한통에 다섯 개씩 10통이 들어 잇는 상자를 두 개 가져갔는데, 그때만 해도 쏘련에 껌이 없어서 한 개만 줘도 아이들이 살살 거리는 것이었다. 와서 껌 한 개를 받아 우물거리면서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는데, 내가 말을 못 알아듣기 때문에 상근이가 통역했다.



내가 껌을 주면 쏘련 아이들은 명태 쪼가리 같은 것에 워드카(보도카)를 한 잔 마셔보라고 권하는 경우가 많았다. 스스로 아직 아이로 생각하고 있던 터라 ‘쏘련 아이들은 술도 참 빨리 마시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까지 술을 입에 대본 적이 없었다. 녀자 아이들까지 마시는 것을 보고 나도 한번 마셔봤지만 맛도 없는데다 목구멍이 타는 것 같은 워드카는 두 번 다시 마실 음료가 아니었다.



나중에 서울에 와서 야영소 얘기를 했는데, 쏘련 녀자들은 일찍 성에 눈뜨기 때문에 뭔가 ‘사건’이 있지 않았느냐는 롱담성 질문을 받았다. 조선이라는 사회는 연애문제에 눈 돌릴 여유를 주지 않는데다, 만경대 혁명학원 등 남의 눈을 의식하게 되는 최고급 간부집단에서 단체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그런 면에 빨리 눈을 뜰 수 있는 기회도 없었다. 아무튼 로씨야어를 배우려던 소년단 야영은 껌 두 상자만 날린 채 끝이 났다.



그런 식으로는 교육이 어렵다고 생각한 이모는 집으로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나에게 로씨야어를 가르쳤다. 로씨야인 선생이 내 방에 와서 하루 두 시간씩 가르쳤다. 또 로씨야어를 잘하는 대사관 리두열 1등 서기관도 가르쳤다. 최준덕 아저씨도 가끔 내 로씨야어 선생을 했는데 아저씨는 이모 치료관계로 병원에 왔다 갔다 해야 하는 등 일이 많아 꾸준히 가르치지는 못했다.



이렇게 몇 개월 동안 로씨야말을 배우면서 기초적인 언어 소통이 가능해진 1977년에 나는 모스끄바종합대학 예비학부에 들어갔다. 예비학부란 외국인들만 다니는 1년짜리 어학과정이다. 외국인들은 의무적으로 예비학부에서 1년간 로씨야어를 배운 뒤 각 대학으로 가게 돼 있었다.

예비학부는 원칙적으로 기숙사에 들어간다. 기숙사 음식도 입에 안 맞기는 마찬가지였다. 홀레브라는 빵은 시커멓게 생긴 게 모양부터 맛없게 생겼고, 국(스프)은 시큼하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었다. 20일 정도 버티다가 다시 이모 집으로 돌아왔다. 국가에서 보낸 북조선 류학생이라면 있을 수 없는 얘기였다.

전체 0

국민통일방송 후원하기

U-friends (Unification-Friends) 가 되어 주세요.

정기후원
일시후원
페이팔후원

후원계좌 : 국민은행 762301-04-185408 예금주 (사)통일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