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일남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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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부 모스끄바의 북조선 특권층, 첫 번째

리일남 수기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3




나는 모스끄바종합대학 예비학부를 1년 동안 다녔다. 78년 예비학부 수료와 동시에 모스끄바 외국어대학 어문학부로 들어갔다. 로씨야어를 전공했는데, 제2외국어는 영어를 선택했다. 로씨야어는 할 수 없이 했지만, 영어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이모부 김정일로부터 탈출하려고 생각했더라면 영어를 열심히 했겠지만, 당시 나는 불편할 것 없는 모스끄바 생활에 푹 젖어 있었다.



나의 외국어대학 생활은 81년 가을에 끝난다. 김정일이 공부 그만하고 나오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이에도 평양에는 몇 차례 들락날락했다. 호사하며 잘 먹고 생활하는 것은 평양이 좋다. 그러나 답답하다. 모스끄바에 있다가 방학 때 평양에 돌아오면 2주일 정도는 쉽게 지나가는데, 2주만 지나면 좀이 쑤신다. 빨리 모스끄바로 돌아가려고 안달하게 된다.



해설 : 지금까지 살펴봤지만 리일남은 물질적으로 부족한 점이 없었다. 그러나 일반 주민들에 비해서 조금 자유가 있었을 뿐, 통제된 생활을 해야만 했다. 때문에 로씨야에서 맛본 자유로운 생활은 매우 달콤했을 것이다. 자유에 대한 동경이 리일남이 북조선을 떠나게 된 배경이다.



내가 모스끄바종합대학 예비학부, 즉 어학연수를 할 때다. 예비학부 강좌장인 녀 교수는, 동양 사람이 얼마 없어서인지 나를 총애했다. 내 로씨야어에 특별한 관심을 표시하면서, 수업이 끝나면 연구실로 불러 집에서 만든 카스테라도 주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 외의 로씨야어 교재도 구해 주고, 로씨야 풍습에 대한 소개 책자도 주었다.



이모에게 고마운 선생님이 있다고 하니, 이모는 옷감과 화장품 한 타스를 선물로 주었다. 나도 인삼주를 자주 선물했는데, 그 녀 교수는 인삼주를 좋아했다. 그 녀 교수는 나를 아들처럼 귀여워했다.



교수에게는 열세 살 먹은 딸 레나가 있었는데, 중학교 수업이 끝나면 엄마 연구실로 자주 놀러왔다. 레나는 당시 열일곱 살인 나를 따랐다. 영화구경 갈 때 가끔 데려가기도 하고, 식당에 가서 밥도 사주곤 했다. 당시 내 로씨야어 실력이 형편없을 때라 레나가 내 가정교사 노릇도 했다.



예비학부 과정 1년이 끝나는 날 강좌장이 자기 집에서 축하연회를 열어주었다. 체료무스케라이언에 있는 집에서 강좌장과 역시 대학교수인 남편, 그리고 레나와 나보다 한 살 많은 아들이 참석했다. 식사하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레나가 나한테 할 말이 있다면서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갔다.



리일남 : 레나, 무슨 일 있어. 할 말이 뭔데?



레나 : 일남, 대학에 진학하더라도 나 계속 만나줄 거지? 대학 가더라도 나 잊어버리면 안 돼...... 자, 이거 받어.



리일남 : 이게 뭐야.



레나 : 선물이야.



리일남 : 풀어봐도 되지? 손수건이네. 냄새 좋다.



레나 : 내가 제일 좋아하는 향수니까 이 향수를 항상 뿌리고 다녀야 해. 알았지.



리일남 :알았어.



레나 : 일남, 키스해도 돼?



리일남 : 아니 어린애가



말하기도 전에 레나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그때까지도 어린애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얼굴이 붉어지고, 순간 짜릿해졌다. 레나는 이후 내게 편지를 계속 보내왔다.



79년 가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고 해서 레나를 한 번 만난 일이 있다. 1년 만에 굉장히 성숙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옷감과 목도리, 세이꼬 시계를 축하 선물로 들고 갔는데, 레나는 직접 짠 옷을 가져왔다. 추울 때 자기 생각하면서 입으라고 주는데, 찡했다. 나는 레나가 어린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성이라는 생각은 없었지만, 당돌한 고백을 받고 당황했던 기억이 새롭다.



모스끄바에는 외교관 자녀들을 위한 구락부가 있다.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에 있는 유고슬라비아 구락부, 미국 대사관에 있는 아메리칸 구락부 등이 그것들이다. 나는 조선 대사관 번호가 붙은 내 차를 타고 미국 해병대가 지키고 있는 아메리칸 구락부에도 자주 갔다.



해설 : 조선 류학생은 미국 대사관 출입이 금지돼 있다. 출입하다가 발각되면 바로 귀국 조치되어 수용소로 끌려간다. 하지만 리일남은 그에 구애받지 않고 미국 대사관을 출입했다. 김정일의 처조카라 가능했던 일이다.



나는 류학생이면 반드시 참가해야 하는 매주의 생활총화도 참석하지 않는 특권층이었다. 처음에는 거기에 참석해야 된다고 담당자가 얘기했지만, 가지 않는 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구락부은 모스끄바에 사는 외교관 자녀들과 류학생들의 사교장이다. 외교관 아빠트 단지도 내가 사는 바빌로바에만 있는 게 아니라 쿠투조프스키 거리 등 여러 곳에 있었기 때문에 구락부에 가야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유고슬라비아 구락부을 자주 갔다. 유고슬라비아 구락부는 가장 인기있는 구락부이라 사람이 제일 많이 모였다. 수요일과 토요일에 유고슬라비아 구락부가 문을 열면 모스끄바의 외교관 자녀들과 류학생들이 거의 모두 모일 정도였다. 구락부의 입장료는 한 딸라, 딸라가 없는 애들은 들어갈 수 없었다.



당시는 남조선 사람이 모스끄바에 올 수 없었기 때문에 동양 사람으로는 일본 아이들이 전부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나 리일남 혼자였다. 다른 조선 류학생이나 외교관 자녀들은 통제가 심하고 딸라도 없었기 때문에 구락부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나는 특출한 존재였다. 용돈도 풍부했고, 옷이나 가지고 다니는 물품이 최고급이었기 때문에 더욱 눈에 띄었다. 내 옷은 오지리나 핀란드에서 사온 것들이었다. 모스끄바에서 찍은 사진이 증명하지만, 당시 나는 인민복에 강파른 인상을 주는 조선 인민과는 닮은 구석이 없었다.



서울도 마찬가지지만, 모스끄바에서도 옷 잘 입고 돈 잘 쓰면 최고였다. 돈을 쓸래야 쓸 곳이 없는 평양과 달리 모스끄바는 이미 돈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유고슬라비아 구락부에 가서 제일 비싼 술을 시켰고, 쩨쩨하게 굴지 않고 가끔 한잔씩 돌리기도 하는 나는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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