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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8화 살얼음판 같은 관저생활

등나무집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애들을 모스크바 프랑스학교로 전학시키고 제네바를 떠난 우리는 모스크바 바빌로바 거리 집에서 생활을 꾸렸다. 나는 평양에서 아직도 대학에 못가고 있는 아들 때문에 속이 타서 1월에 먼저 평양에 나갔다. 일남이를 대학에 정말 보내주겠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애는 신분을 확인해 줄 문건이 없었다.



해설: 1982년 정남이 일행은 2년동안의 제네바 유학을 정리하고 다시 모스크바로 갔다. 그때 이일남은 모스크바유학을 마치고 김정일의 관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일남이는 절간 같은 집에서 학교는커녕 외출금지인 규율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는 운전사들에게 내 트렁크를 다 뒤져 뇌물을 바치고 시내로 빠져나가는 과장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 시절에는 고려호텔도 없었다. 그 애가 고작 갈 수 있는 데는 창광원수영장이나 옥류관, 외화상점의 커피집 뿐이었다. 내가 너무 실망하는 걸 보고 “엄마 걱정마, 9월에는 대학에 보내주실거야”하는 것이다. 그 애는 빠빠를 하느님처럼 믿고 있었다. 얼마 후 나는 그 애가 지도자동지께 편지를 올렸다는 것을 알았다. 지도자동지가 과장에게 전화해 “일남이 입당 준비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일남이는 제 생일날이던 4월2일 입당심의를 받았다. 소련가서 6년이나 수정주의를 잔뜩 먹고 나왔을 한창나이 애 녀석에 대한 김정일 비서의 미심쩍음은 그 애의 편지로 투명해졌다. 지도자는 그 편지 한통으로 일남이가 순직한 애이며 역시 만경대학원 출신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 애에 대한 이런 호감의 연장이 그해 가을 제네바 유학이라는 뜻밖의 배려를 가져오게 됐다고 생각한다. 그해 여름방학에 모스크바에서 정남이, 남옥이가 나왔다. 일남이는 정남과 함께 매일 수영을 하고 녹화를 하느라 밀려다니면서 김정일 비서의 시야에 있었다.



관저생활에 익숙하지도 못하고 지도자의 기호도 성격도 모르는 애가 무슨 실수라도 하지 않겠는지, 그 예민한 사람의 눈밖에 나면 어쩌나 나는 늘 마음이 쓰였다. 지도자와 같이 식탁에 앉을 때는 그 애가 실수할까봐 나는 먹는 둥 마는 둥 긴장해 있곤 했다.



하루 김정일 위원장이 몹시 불쾌해서 들어와 식탁에 앉았다. 그 사람이 그렇게 기분 나빠할때는 주변사람은 물론 온 집안을 얼어들게 냉기를 뿌린다. 이런 때 우리는 다 죽어 없어졌으면 싶었다. 그렇게 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제 아버지를 따르던 정남이 마저도 이런 때는 돌덩이가 된다.



점심은 냉면이었다. 정남이 옆에 앉았던 일남이는 늘 하던대로 정남이 냉면그릇에 조미료를 넣어주고 젓가락으로 사리를 풀어주려고 정남이 가까이 가서 섰다. 나는 그 애가 이 냉각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이 불안하여 그 애 동작을 속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 애가 조미료가 담긴 받침대에서 간장병을 집으려는데 간장병이 붙어 나오지 않았다. 모든 시선이 그 애의 손에 집중되고 있었다. 지도자까지도.



정남: 일남아, 나 간장 안 넣어도 돼.



일남이가 두 손을 다 써서 간장병을 떼려고 허리를 굽혔을때 정남이는 그만 두라고 간장을 안 넣겠다고 속삭였다. 이제 간장병이 안 떨어지면 그것 때문에 빠빠 성이 분출구가 되어 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제때에 행주질을 안해 진한 간장이 흘러 엿처럼 말라붙은 것이다.

나는 그 애가 그만두고 주방에 가서 간장병을 들고 왔으면 싶었지만 미처 그런 여유를 못가진 일남이는 볼에, 입에까지 힘을 잔뜩 주고 간장병과 받침을 비틀고 있었다.



이제라도 지도자가 화낼 순간 간장병이 딱 소리를 내며 받침에서 떨어졌고 간장이 출렁거렸으나 일남이의 가는 손가락에 조금 묻었을 뿐이었다. 이 순간 일남이는 “에이 혼났다”하며 어쩌자고 빠빠를 향해 헤짝 웃었다. 다른 사람 아닌 그 무서운 사람을 향해. 그 천진하고 아무 거리낌없는 웃음을 받는 순간 빠빠의 얼굴은 놀라움과 반가움 때문에 역전하는 피의 순환으로 붉어지기까지 했다. 얼음은 순식간에 녹아버리고 식탁은 곧 화기가 돌기 시작했다.



정일비서와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가슴 졸이는 일인지 관저생활의 일화가 하나 더 있다. 70년대 동평양집에서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낮이었다. 오후 출근을 하려고 현관을 나선 정일비서가 차에 앉으려다말고 생각난 듯 영화기사 철수를 찾았다. 영화기계 부속을 알아보려는 것 같았다.



관례대로 그 현관에는 정남이를 데리고 할머니, 나, 남옥이외에 셋이 더해서 총 7명이 서있었다. 그들은 지도자의 침실 등을 관리하는 관리원, 정남이를 뒷바라지하는 총각 규채, 그리고 우리집을 총관리하는 중앙당 부부장 편재의 과장이었다.



과장: 철수 이 놈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 현관에서 오른쪽으로 후미진 곳에 영사실 뒷문이 있었다. 과장은 급히 영사실로 뛰어갔다. 그런데 영화기사가 영사실에 없었다. 야단났다. 그 집 규율은 선생님이 집에 계실 때에는 모든 성원은 자기 초소에서 대기하여야한다. 영화기사는 영사실에서, 목수는 목수칸에서, 요리사는 주방에서, 관리원은 관리원 대기실이다. 그것은 선생님이 임의의 시간에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나 남옥이, 할머니마저도 이 시간은 정남이가 주로 있는 유희장에서 대기상태에 있어야했다. 그가 서재에서 혹은 응접실에서 신호를 누르면 각자 대기실 신호판에 불이 켜지며 어디에서 찾는다는 곳이 알려진다. 영화기사가 영사실에 없다는 것은 이 규율을 어긴 것이다.



과장: 선생님, 영사실에 없습니다.



김정일: 빨리 찾으라



과장은 얼굴이 빨개서 죄스럽게 말씀을 올리고 ‘빨리 찾으라’는 책망에 부관실로 달려갔다. 부관실 자동문은 내정을 다 지나 몇백미터 밖에 있었다. 규채도 뛰고 관리원도 뛰어 어디론가 갔다. 주방 뒤에 요리사들 운전사들이 흔히 모여 잡담하는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관에 남아있는 우리는 불쾌해지기 시작한 김비서의 서슬에 가슴이 두근두근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제 날벼락이 나겠는데... 무섭다. 그 얌전하고 착실한 영화기사 총각이 선생님이 나가시기도 전에 자리를 비운 것은 비정상이었다. 이렇게 소동이 앞뒤에서 벌어졌는데 좀 맘을 써서 선생님이 지시를 미루고 나가줬으면 좋으련만 자 보라 이게 무슨 꼴이냐 하듯 끝장을 볼 테세였다. 정남이는 울상이 됐고 할머니는 두 손을 명치끝에 잔뜩 올려 맞쥐고 전전긍긍해하셨다. 하루가 멀다하고 생기는 이런 긴장된 순간을 안으로만 안으로만 타격받는 파리한 내딸의 얼굴은 또 질려 있었다. 이런 때 그 애는 금세 먹은 점심이 다 체해 버리곤 했다.



내정은 전부 아스팔트가 덮여있어 삼복의 더위를 내뿜고 있었다. 현관은 대리석이고 넓은 지붕 밑에 있었건만 곧장 불어오는 대동강 바람도 훅훅 덥기만 했다. 성미가 급한 지도자는 부관실 쪽을 향해 빨리 오지 않는 과장을 나무라듯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아마 15분, 20분은 걸렸을 때였다. 부관실 쪽에서 영화기사 애가 뛰어오고 있었다. 날씨가 너무 더워 잠깐 샤워 맞으러 갔던 것이다. 너무 죄송한 나머지 울려고 하는 표정으로 숨이 턱에 닿아있었다.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멎어서 고개를 숙이고 민기적 민기적 발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벽력같은 책망을 예감하며 겁먹어 우둘우둘 떨었다. 뒷짐을 지고 성이 치밀었던 지도자는 한마디 꽥 하는 것 같았는데 그 목소리에는 이미 독이 없었다. 잠시 후 “욕사발을 먹이려다가 제 엄마가 저걸 보고 얼마나 불쌍해할까...” 하는 정일비서의 혼잣말에 대동강 바람마저 시원해 졌다.



우리는 윙윙 칼바람이 도는 시커먼 굴 칸을 조심조심 더듬으며 서로를 확인하며 위안을 찾으며 살고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쿼바디스>를 읽으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권력의 피해를 입지 않은 풍류판관 페트로뉴스는 “적당히 추종하고 적당히 제어하는 방법으로” 살았다고...



우리는 그 불같은 성격에 조화되어 갔고 그 사람과 인간적 유대를 엮어갔다.









원작: 성혜랑

극본: 최수연, 리유정

연출: 박은수, 남유진

낭독: 최연수, 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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