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나무집

  • 방송정보 | 종영방송
  • 출연진행:

공식 SNS

2부 6화 정남의 제네바 유학

등나무집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8




1976년 3월 18일 나는 정식으로 정남이의 가정교사로 입적했다. 과목은 국어, 산수, 역사, 피아노, 노어. 학습실은 김정일 비서의 부관실에 꾸려졌다. 김정일은 첫날 수업부터 우리 학습의 규율을 엄격히 지키도록 조직해주었다. 정남이 숙제노트에 수표를 해주고 의견을 적어주기도 했다. 3년 동안에 이렇게 인민학교 4학년 과정을 마칠 수 있었는데 애 아버지는 이모의 역할을 높이 평가해 주었다. 가정교사가 되면서 위수구역 안 새로 꾸려준 빌라에 아이들을 데리고 이사를 했으며 그것도 멀다고 관저안에서 숙식하도록 방을 배정해주었다.



하지만 정남이는 이래저래 비밀노출을 엄단하느라고 바깥세상을 보지 못하고 울타리 안에서만 자랐다. 합법적으로 갈 수 있는 곳은 봉화진료소 뿐이었다. 천으로 차창을 전부 가린 수인차를 타고.....



김정일 비서는 이렇게 자라고 있는 아들이 애처로워서 자기 힘자라는 껏 아들을 위한 것이라면 그 무엇도 아끼지 않았다. 김정일 비서는 이 세상의 어느 아버지보다도 아들을 사랑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저토록 사랑할 수 있을까 놀라웠다. 때문에 자기 아들을 맡고 있는 할머니를 우대했으며 그 아이의 가정교사를 맡았던 나에게도 고맙게 대해 주었다.



이렇게 최대의 권력, 최대의 사랑 밑에 정남의 수업은 질서정연하게 인민학교과정을 마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대전제가 틀린 논리전개처럼 빨리 중지하고 다르게 시작해야 된다는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정남은 울타리 바깥세상과 철저히 격리된 상태에서 단 한명의 친구도 없이 어울려 뛰어노는 즐거움을 모르고 기형적으로 키워지고 있었다. 아이를 세상에 내놓지 못하는 제 아버지의 처지를 우리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이 비정상적인 생활을 강요하고 있는 그를 찬성할 수 없었다. 제 엄마의 병의 원인이 이것이었다.



할머니는 아이를 차 태워가지고 멀리 시외로 나가 풀을 뜯는 소나 염소를 보여주고 뛰어노는 아이들 곁에 가보라고 손 놓아주었다. 정남은 멀리서 그 애들을 소나 염소처럼 보기만 했지 다가가지를 못했다. 애들끼리 하는 말을 몰랐고 종적인간관계밖에 체험하지 못한 정남에게는 횡적교제가 불가능했다.



할머니의 구상은 시간을 놓치지 말고 아이를 정규교육에 넣기 위해 모스크바로 떠나야한다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할머니께서 모스크바에 가서 제 엄마와 같이 설을 쇠고 왔으면 좋겠다는 청을 올렸다.



그때 형편에서 제 아버지에게서 아이를 떼어 외국으로 공부를 떠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김정일 비서는 그 아들을 품에서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이성보다 정이 앞서고 살이 더 강했다.



할머니께서는 “잠깐 다니러 갔다 오게 하고 아이를 내놓는데 제 아버지 감정을 훈련시킨 다음 제기해야지 처음부터 외국에 가 공부시키겠다고 하면 성만 낼 것이다.”며 그를 설득시키기로 했다. 드디어 많은 수행원을 데리고 할머니가 단장이 되어 모스크바로 떠났다. 이것이 얼마나 힘들게 이루어진 첫출발이었는지는 하느님이나 아시겠는지.



6개의 보초 차단막 안에서 8년 동안 갇혀있는 정남을 데려 내오기 위해 할머니가 기울인 그 열성과 집념은 무기수를 석방하기 위한 것보다 더 어려운 투쟁이었다.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그애는 울타리 안에서 진주닭과 흰토끼 회색 토끼굴을 오가며 원남동 떼부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떼부는 1950년 서울 원남동에 살던 비만인으로 온 장안이 다 아는 기형아다.

불과 한두달의 체류승인을 받고 모스크바에 가셨지만 할머니에게는 처음부터 다른 구상이 있었다. 모스크바 바빌로바 거리 집 근처에 있는 학교에 정남이를 시험 삼아 무조건 입학시켰다. 그해따라 모스크바 추위는 영하 30~40도로 내려가곤 했다. 집안사람 외에는 사람을 보지 못한 아이는 교실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미리 짜놓은 경험 많은 소련 여선생이 어떻게 얼러서 애를 문안으로 들여세운 틈에 데리고 갔던 사람들은 아이를 밀어 넣고 떠나와 버렸다.



두 시간이 지났을까 애는 얼음바지가 된 뻣뻣한 뻗정다리로 성이 독같이 나서 집을 찾아 걸어왔다. 화장실이 너무 더러워 들어가지 못하고 바지에 오줌을 싼 채 영하30도에 외투도 찾아 입지 못하고 집으로 온 것이다. 정남은 다시는 학교에 가려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소련에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수술실만큼 청결한 위생실만 쓰던 애를 달리 설복할 수도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할머니는 소련이 아니면 어디에서 공부시킬 수 있을 것인가, 위생실이 깨끗한 나라, 제네바에 갈 수 없을까... 그때 제네바에 김정일 비서의 빌라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할머니는 “스위스? 거기는 변소가 깨끗하겠지. 제네바에는 국제학교가 있다. 인디라 간디가 다녔다는... 유명한 학교니까 제 아버지가 혹시 보내지 않을까?”하고 희망을 품으셨다.



이렇게 하여 김정일 비서의 마음이 스위스로 쏠리도록 할머니의 긴장감 도는 유도작전이 시작되었다. 그 까다롭고 성급한 김정일 비서의 눈치를 보며 밥상머리에서 한 치의 실수도 없게 조심스러이 조금 조금 그의 관심을 그쪽으로 유도하느라 흰 관자놀이에서 핏줄이 튀던 할머니의 모습은 처연한 감마저 들었다.



할머니는 그때 우리집에 자주 오고 정남을 무척 사랑하던 고모부 장성택 과장을 크게 믿었다. 그는 할머니의 이런 진심을 깊이 동정하고 자기의 역할을 하겠다는 마음지원을 표시했다. 그가 할머니의 편이 되어준 것은 제네바로 갈 수 있게 된 결정적 동기가 되었다. 할머니는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았다. 장성택 과장은 인간적인 일에 발 벗고 나서는 장점과 정의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장과장이 솔선하여 지금 제네바 대사가 된 이철을 발탁했고 그들은 선발대로 제네바에 먼저 들어갔다.



해설: 김정일은 아무리 고위급간부 자녀라도 자본주의국가로 유학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인민무력부장 오진우가 손녀를 오지리 빈에 유학시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 과정이 어렵긴 했지만 정남은 예외였다. 이일남에 따르면 정남을 유학 보낼 국가는 남조선통일을 염두에 두고 자본주의 국가를 물색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이일남 : 자본주의국가 중에서도 가장 교육체계가 잘 잡혀 있는 나라를 찾아야했다. 거기다 김정일의 아들인 만큼 정남이의 신분에 걸맞게 고급이어야 했다. 이철대사가 스위스, 오지리, 스웨덴, 노르웨이 등 정남이가 유학갈만한 곳을 헤집고 다녔다. 최종적으로 선택된 게 스위스였다. 김일성 김정일 직계 중에서도 자본주의 국가에 유학 간 것은 정남이가 최초였다. 김정일의 다른 자녀들은 대개 모스크바나 체스꼬, 뽈스까, 중국에서 유학했다. 그러나 후에 김정일과 고영희사이의 아들 정철과 정운은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에 다녔다고 들었다.



이렇게 몇 줄 적어놓은 그때의 사업추진이 그 당시 얼마나 불안하고 막연한 것이었는지 설명하기 힘들다. 한없이 바쁜 나라일로 여념이 없는 애아버지의 기분에 모든 것이 달렸기 때문이다.



선발대가 학교와 거주조건 등 거기서의 모든 교육을 위한 실무적 준비를 마치고 돌아왔으나 우리는 떠나야 떠나나보다 할 수 밖에 없었다.









원작: 성혜랑

극본: 최수연, 리유정

연출: 박은수, 남유진

낭독: 최연수, 윤옥

전체 0

국민통일방송 후원하기

U-friends (Unification-Friends) 가 되어 주세요.

정기후원
일시후원
페이팔후원

후원계좌 : 국민은행 762301-04-185408 예금주 (사)통일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