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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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중국의 개혁개방, 그리고 등소평

개혁개방의 기적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7-28 15:18




[효과] 중국 35돐 국경절 장면



1984년 10월 1일, 25년 만에 다시 부활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35돐. 중국인민들의 가슴에는 희망이 가득했다. 중국인민 모두가 이 날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기념식 환영대렬엔 눈에 띄는 작은 선전 문구가 있었다. “샤오핑, 니하오”. “안녕하세요? 등소평”이란 뜻이다. 당시 중국의 대학생들이 개혁개방의 지도자 등소평을 생각하며 만든 문구였다. 이전이었다면 개인숭배 분위기가 짙은 ‘등소평, 만세’라는 구호가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날 “샤오핑 니하오”를 외치는 인민들의 표정에는 친근함과 활기가 넘쳤다.



중국이 이처럼 활력을 찾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중국은 오랜 기간 암흑의 시기를 걸어왔다. 건국 직후, 중국은 토지를 몰수해 모든 인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했다. 1958년 농업생산량과 강철생산량을 높일 목적으로 대약진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결과는 1천만 명 이상이 굶어죽는 참혹한 것이었다. 중국공산당 내부에서는 로선과 정책을 놓고 대립했다. 수십만 명의 홍위병들은 봉건구습을 청산한다는 명목으로 개인과 사회, 문화를 철저히 파괴했다. 이것이 바로 1966년에 발생한 문화대혁명이다.



중국은 선택해야 했다. 계급투쟁과 문화대혁명을 고집하며 국가와 인민에 대한 파괴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문화대혁명을 중단하고 무너진 중국공산당의 권위와 신뢰를 다시 쌓을 것인가? 역사적인 선택의 막중한 책임이 등소평에게 맡겨졌다.



등소평은 개혁개방을 선택함으로써 위기 국면을 정면에서 돌파했다. 서해연안의 항구도시 선전을 비롯한 네 개 도시를 개방했다.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시장경제를 중점적으로 실시할 특별구역을 설치했다. 등소평은 왜, 개혁개방을 선택했을까? 중국을 개혁과 개방으로 떠민 힘은 무엇이었을까? 중국 당 력사연구실 ‘장화’ 연구원의 말을 들어보자.



[장화 / 중국 당 력사연구실]

“그 당시 등소평이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무엇이 사회주의냐, 어떻게 사회주의를 건설하느냐. 사회주의는 절대로 빈곤이 아니다. 빈곤은 사회주의가 아니다. 사회주의는 반드시 빈곤을 소멸해야 한다는 개념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 개혁개방에 내재된 가장 강력한 동력입니다.”



등소평은 유능한 인재들을 뽑아 서유럽 다섯 개 나라로 시찰을 보냈다. 시장경제를 도입하기 전에 자본주의 경제를 철저하게 연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등소평 자신은 미국과 일본을 직접 방문했다. 정치적으로는 적국이었지만, 시장경제를 알기 위해서는 경제발전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등소평은 100년에서 200년을 앞서 있는 자본주의 경제를 따라잡으려면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좀 더 과감하게 개방하고 좀 더 빠르게 개혁했다.



어느날 일본 닛산 자동차 공장을 견학한 등소평은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곳의 로동생산률은 중국 장춘 제1자동차회사의 수십 배에 이르는군. 이것이 바로 현대화라는 걸 알게 되었네.”



그는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삼보주’를 제시했다. 한걸음, 한걸음 단계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키자는 것이었다. 등소평은 경제발전을 향한 중국의 첫걸음, 즉 제일보는 ‘인민이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2보는 인민의 생활수준을 중간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으며, 제3보는 중국의 현대화를 통해 대동사회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등소평은 100년 후를 내다보며, 후계자들에게 개혁과 개방으로 흔들림 없이 나아가라고 당부했다. 확고한 신념아래 개혁개방을 추진해온 결과, 중국경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했다. 중국은 지금 제3보인 현대화의 길을 걷고 있다. 경제규모를 기준으로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 경제대국으로 발전한 것이다.



[효과] 1989년 11월 제13기 5차 당중앙 전체회의, 등소평 은퇴선언



등소평은 1989년 11월, 제13기 5차 당중앙 전체회의에서 은퇴를 선언한다. 인민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평범한 중국 인민으로 돌아갔다. 원로 간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젊은 지도자를 골라 육성하고 그들을 뒤에서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등소평은 나이 든 원로 간부들에게 일선에서 물러날 것을 권고하고 새로운 지도자들이 중국을 이끌게 했다.



그는 은퇴 후에도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생활했다. 1997년, 아흔 세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한 겨울에도 랭수마찰을 하고 수영을 즐겼다. 손자들이 뛰어노는 소리를 들으면서 책을 읽었고, 인민들과 함께 나무를 심기도 했다.



북경 천안문 광장에는 모택동을 그린 커다란 그림이 걸려있다. 언젠가 미국의 한 여기자가 이것을 보고, 등소평에게 물었다. “모택동 사진을 영원히 걸어둘 것인가요?” 등소평은 짧게 대답했다. “영원히 걸어둘 것이오.” 모택동에 대한 등소평의 평가를 들어보자.



[등소평]

“지난날의 잘못을 모두 모택동 한 사람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모택동을 평가해야 합니다. 공이 우선이고 과오는 두 번째입니다. 우리는 모택동의 올바른 사상을 계승해야 하고 그의 과오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말해야 합니다.”



문화대혁명 기간, 등소평은 세 번이나 숙청됐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변방으로 추방되어 혹독한 감시 아래, 부인과 함께 농기구 공장에서 일하면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평범한 지도자라면, 절대 권력을 잡은 후 과거의 상처를 그냥 덮어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등소평은 과거와 싸우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의 ‘과거 청산 주장’을 일축하고, ‘모택동 동지의 공적이 7할이고 과오가 3할이다’는 말로 모든 과거를 정리했다. 등소평은 미국신문 ‘타임즈’를 통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과장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한 일은 중국 사람과 중국 사회주의자들의 뜻을 대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혁명 이전에 나 역시 당 간부 중 하나였다. 당시 저질러진 실수에 나도 책임이 있다. 결국 결함 없는 인간은 없지 않는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줄 아는 용기. 인간적인 겸손함. 력사에 대한 깊은 안목. 이것이 결국 ‘과거에 대한 포용력’으로 이어진 것이다. 과거를 보듬고 미래를 준비하는 등소평의 현명한 선택으로 오늘날 중국은 번영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나라를 세우는 것만큼이나 위대했던 제2의 혁명, 개혁개방은 등소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개혁개방의 기적’, 제1부 ‘중국의 개혁개방, 그리고 등소평’편을 보내드렸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제2부 ‘활력 넘치는 중국’편을 방송합니다. 개혁개방 이후 변화된 중국의 모습을 생생하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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