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 방송정보 | 종영방송
  • 출연진행:

공식 SNS

사회안전성 심화조 사건의 실체, 첫 번째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2-01-06 18:10


내레이션: 김일성이 죽자 김정일은 자기 아버지의 측근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심화조 사건을 일으켰다. 1997년 말부터 3년간 진행된 이 사건으로 2만5,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숙청당했다. 권력의 전환기에는 늘 피바람이 몰아치게 마련이다. 김정일의 통치 방식을 계승한 김정은도 앞으로 심화조 같은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다. 김정일의 권력 장악 비화를 통해 김정은의 선택을 전망한다. 추적 사건과 진실, 사회안전성 심화조 사건의 실체.



심화조 사건의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김일성이 죽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의 죽음은 인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김정일이 수십 년간 진행해온 우상화 선전으로 김일성은 신 같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그가 죽는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였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김일성이 죽고 나자 곧바로 식량난이 전국을 덮쳤다. 민심은 흉흉해졌고 김정일은 자신의 권력이 흔들릴까봐 전전긍긍했다. 김정일의 전속 료리사 일본 사람 후지모도 겐지가 1994년 김일성의 장례가 끝나고 가진 측근들과의 연회에서 김정일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다.



후지모도 겐지: “그렇게 열흘 보름이 지나서 연회가 오랜 만에 열렸는데, 파티 중에 술을 마시면서 장군님이 이런 말을 했어요. 두 번 목숨을 건졌다. (중략) 자신이 숙소에 들어가서 권총 앞에서, 한 시간, 두 시간 계속 권총을 보고 있었는데......



당시 김정일은 권총 자살을 하려다 셋째 안해 고영희의 만류로 그만두었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의 말대로 하자면 김정일은 아버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진심이 아니였다. 측근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보여주기 위한 빈 말에 불과했을 뿐이다. 김정일이 권총을 들여다본 리유는, 김일성의 측근 세력들을 없앨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김정일의 속심은 8년 뒤, 그에 입을 통해서 확인 된다.



2002년 2월 15일, 김정일은 당 중앙 선전선동부 부장 정하철,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리용철, 인민군 총정치국 국장 조명록, 인민군 대장 현철해, 박재경 등 주요 간부들을 소집해 자기 안해 고영희에 대한 우상화 선전을 할 데 대해 지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정일: “우리 집사람은 충신 중의 충신입니다. 우리 집사람처럼 나를 아끼고 위해주는 혁명 동지는 없습니다. 나는 수령님 3년 상을 치르는 전 기간, 몸에 권총을 휴대하고 살았는데, 그 총은 우리 집 사람이 혹시 나쁜 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면서 나에게 아침저녁으로 쥐어준 것입니다.”



김정일이 김일성의 죽음 이후 누군가의 위협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는 고백이다. 1991년 12월 최고사령관직을 물려받으면서 김일성으로부터 모든 권력을 넘겨받은 김정일을 누가 위협하고 있었던 것일까? 바로 김일성의 측근들에 대한 김정일의 의심과 불안감이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1994년 7월 8일 김정일은 김일성의 죽음이 확인된 그 순간, 자신의 경호를 담당하는 호위총국 2호위부에 비밀지시를 내린다.



김정일: 2호위부장, 특별 명령을 하달한다.

호위부장: 최고사령관 동지,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김정일: 지금 즉시 2호위부는 전투동원태세를 유지하고, 1호위부 성원들을 철저히 감시하라. 사소한 움직임이라도 즉시 보고하라. 알겠나?

호위부장: 네, 최고사령관 동지!



김정일의 불안감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였다. 김일성의 경호를 담당했던 호위총국 1호위부 내 고급군관 한 사람이 김정일을 향해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총격전 과정에서 김정일의 경호원이 즉사하고 주변의 간부 하나도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정일은 1호위부를 해산했으며 한평생 군복을 입고 호위 사업에서 늙어온 호위사령부 선전부장, 정치부부장, 조직부장, 간부부장 등 많은 간부들을 안기부 연루자로 몰아 청산했다. 그러고도 그 뿌리를 다 뽑지 못했다고 여겼는지, 호위사령부 대신 인민무력부 보위사령부에 10처라는 신설 경호부서를 내오게 하여 거기에 자기 목숨을 맡겼다. 오늘날에는 그 10처가 국방위원장 직속 행사총국으로 승격되여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말이 있듯이, 김정일은 권력을 잡기 위해 자기 아버지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나갔던 일을 떠올렸다. 이에 불만을 품은 김일성의 측근들이 자신을 위협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됐다. 김정일은 간부들에 대한 감시를 더욱 강화해 나갔다. 당시의 분위기를 황장엽 전 로동당 비서의 회고록에서 엿볼 수 있다.



황장엽 회고록: “1995년, 식량 사정은 나날이 악화되어 가는데도 김정일은 그런 사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독재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중앙당 내의 보위관계를 관리하는 요원이 나를 조용히 찾아와 “사무실에는 도청장치가 되어 있고, 카메라가 설치되어 모니터로 샅샅이 볼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면 모두 기록되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측근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우선 김정일은 당 조직지도부 4과를 통해 김일성의 측근들을 제거해 나갔다. 조직지도부 4과는 김정일이 특별 관리하는 부서로, 고위 간부들의 비행을 색출해 처벌한다는 일명 ‘암행어사’ 부서였다. 이 부서의 실제 역할은 김정일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간부들을 제거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중앙과 각 시·도에 널려 있는 친김일성 인사들을 단번에 제거하기에는 당 조직지도부 4과의 힘만으로는 시간적으로나 조직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더욱이 김일성이 사망하고 식량난까지 겹쳐 정국이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칫하면 예측할 수 없는 돌발사태가 조성될 수도 있었다. 김정일은 적절한 시기를 고르고 있었다.



추적, 사건과 진실 “6. 25전쟁의 진실” 사회안전성 심화조 사건의 실체, 첫 번째 시간이였습니다.

전체 0

국민통일방송 후원하기

U-friends (Unification-Friends) 가 되어 주세요.

정기후원
일시후원
페이팔후원

후원계좌 : 국민은행 762301-04-185408 예금주 (사)통일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