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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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의 진실, 열세 번째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12-16 16:57


나레이션: 1950년 6월 25일, 고요한 일요일 새벽의 평온을 무섭게 깨뜨리며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포성이 울려 퍼진다. 3년 동안 전개된 동족상잔의 엄청난 비극, 우리 민족 모두에게 커다란 불행과 고통을 들씌우고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킨 그 전쟁의 도발자는 과연 누구인가? 추적, 사건과 진실,“6. 25전쟁의 진실”



지난 이야기> 본국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를 중립국 관리에 맡기자는 인디아 결의안과 대만해협봉쇄를 철회한다는 미국의 립장이 발표되면서 장기간 중단됐던 휴전회담이 재개됐다. 한편 막후에서 전쟁종결을 방해하던 쓰딸린이 사망하면서 휴전협정체결이 가시화되는데...



쓰딸린이 사망하자 쏘련은 즉시 조선반도에 대한 정책을 바꾸어 전쟁종결에 대한 방침을 확립했다. 쏘련의 새 지도부에겐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KBS기록영화 6.25전쟁 8부에서 아나똘리 따르꾸노프 로씨야 국제관계대학 총장의 말이다.



아나똘리 따르꾸노프: “쓰딸린이 죽고 나서 쏘련의 당면 과제가 달라졌습니다. 우선 국제협력관계에 관심을 가졌고 전쟁 후 내부 재건문제, 민생복지, 경제회복 등이 가장 우선 과제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8년이 지난 시점이었는데도 전쟁의 폐허가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조선반도 전쟁에 앞서서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것들이 산적해있었습니다.”



쓰딸린의 강요로 억지로 전쟁을 지탱해온 북조선과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었던 중국은 쏘련의 방침을 즉시 받아들였다. 미국 등 유엔군도 하루속히 전쟁이 끝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휴전회담은 빠르게 진행됐다.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3년 1개월에 걸친 긴 전쟁, 협상으로만 무려 2년 이상 걸렸다. 유엔 측 종군기자로서 당시 휴전회담장을 직접 취재했던 비치 기자의 회고를 성우의 목소리로 들어보자.



성우:“멀리서 포성이 들렸다. 판문점 지역에 배치된 해병들이 전쟁을 마무리 짓는 소리였다. 그리고 조인식이 끝났다. 해리슨과 남일은 마치 목각인형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최소한 공식적으로 전쟁은 종결되었다. 서명절차가 다 끝난 것은 아니지만, 문서상으로 전쟁이 마침내 막을 내린 것이다.”



휴전협정은 조인 12시간 후에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그때서야 량측 병사들은 서로를 향한 총부리를 내릴 수 있었다. 전쟁의 종결, 병사들에겐 꿈같은 현실이었다. KBS기록영화 6.25전쟁 8부에서 당시 국군이었던 이공록 로인의 말이다.



이공록: “꿈인지, 생시인지, 전쟁이 끝났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믿어지지가 않아요. 나는 오늘 하루도 또 새로운 작전명령이 떨어져가지구 아마 오늘이야말로 내가 죽는 날이다.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휴전을 맞이하게 됐지요.”

전쟁이 끝난 후 북과 남은 저마다 승리자라고 자처했다. 북조선은 남조선의 북침을 저지하고 미국의 력사상 첫 패배를 안겼다고 자축했고 남조선 역시 공산세력의 남침야욕을 막아내고 대한민국이 승리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북남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 피를 나눈 동족사이에 벌어진 골육상쟁의 비극이었다. 그 시작은 쓰딸린의 승인과 중국의 지지를 받은 김일성의 남침도발에 의한 것이었지만 진행과정이나 끝은 철저히 쏘련에 의해 좌지우지된 외세의존 전쟁이었다. 6.25전쟁으로 조선반도 전체가 처참하게 파괴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귀중한 목숨을 잃었다. 이 전쟁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큰 피해와 고통을 가져다주었는지 구체적인 통계 자료를 성우의 목소리로 살펴보자.



성우: 전쟁의 참화로 북과 남은 거의 잿더미가 되었다. 특히 북조선은 폭격으로 전체 산업시설의 80%와 4분의 1이상의 농토가 파괴되었다. 북과 남 모두 합쳐 사상자는 무려 5백만명에 달했으며 그 중 85%가 민간인이었다. 이 외 20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10만 명의 전쟁고아, 9만여 명의 국군포로와 8만여 명의 랍북자, 1000만 여명의 리산가족이 생겨났다.



전쟁이 가져다준 모든 비극 중에서도 가장 큰 비극은 북과 남의 적대감과 증오의 골이 깊어진 것이었다. 전쟁 기간 량측은 점령지에서 수많은 학살을 자행하였다. 사상이 다르다고 죽였고 살기 위해 협조했다고 처단당해야 했다. 그 대표적 사건이 바로 신천학살사건이었다. 북조선 당국은 미국의 만행으로 선전하고 있지만 그 사건은 사실 동족사이에 빚어진 참혹한 복수극이었다. KBS 기록영화 6.25전쟁 7부에서 신천학살에 대한 강수진 로인의 증언이다.



강수진 : “북진 할 때 저 사람들이, 빨갱이들이 사람을 많이 죽였다고, 반동분자라면서 많이 죽이구 갔어요. 죽이고 막 도망간 거라, 그 담에 국군들 들어오니까, 우리 편에서는 가만있겠어요? 자기 부모형제가 죽었는데, 복수 하는 거지요. 그 때 도망 못간 부모들 있었거든. 거 또 죽인 거라. 자기네가 먼저 죽였으니까 우리가 또 죽였거든, 그 다음 다시 국군들이 후퇴하고 저 놈들이 나오니까 또 가만있겠나? 또 죽이는 거야, 우리가 또 도망가니까, 또 죽이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런 식이라, 복수전이지,”



이렇듯 6.25전쟁은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김일성은 남조선해방과 북남통일이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전쟁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성우 : KBS 기록영화 6.25전쟁 10부에서, 전쟁 참가자 양순용 로인의 말입니다.



양순용 : “전쟁이라는 것은, 세상에 다 살자고 나오고 자유를 맛보자고 다 사람이 생활을 하고 이러는데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모든 것이 몽땅 파괴될 뿐만아니라 목숨까지 앗아가는 거지 허무한 짓이지, 완전히, 죽고 난 다음에 다거든, 아무것도 없는 거라, 그런데 이런 걸 생각해가지고 전쟁, 원래 전쟁이라는 단어가 없어져야 해”



6.25전쟁은 북과 남 모두에게 커다란 불행과 고통을 들씌웠고 민족의 분단을 더욱 더 고착화시켰다. 김일성은 당연히 전범자로, 민족의 반역자로 심판을 받아야 했지만, 그 모든 책임을 박헌영과 남로당계에 뒤집어씌워 숙청했다. 그로써 전쟁을 자기의 독재권력 구축을 위한 기회로 삼았다. 이후 북조선은 김일성 가문을 위한 독재국가로, 수백만 인민이 굶어죽은 가혹한 인권불모지로 전락되어갔다.



권력을 대물림한 김정일은 지금까지 ‘남조선 해방 전쟁’이라는 구호를 버리지 않고, 인민경제를 희생시키면서 군사력 강화에 매달리고 있다. 지난해 천안호와 연평도 사건을 일으키는 등 대남도발 만행도 멈추지 않고 있다. 이 모든 불행과 비극의 씨앗은 38선을 경계로 한 휴전선, 그것을 초래한 6. 25전쟁에 있으며 그 전쟁의 도발자는 다름 아닌 김일성이었다.



추적, 사건과 진실 “6. 25전쟁의 진실”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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