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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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놀라운 사실

부치지 못한 편지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2




잘 있었나 샘?



중국 단동에서 남포항으로 가는 배 안에서 편지를 쓰네. 짐작했겠지만 내가 탄 배에, 독일에서 보낸 의약품들이 가득하다네. 지난번에 말했던 대로 김부장 덕에 중국까지 나올 수 있게 됐네. 배를 타고 들어올 생각은 못했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약품들이 조선으로 옮겨지는 걸 직접보기로 결심했다네. 물론 김복식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며 비행기를 타자고 했지만 내가 고집을 꺾지 않자 마지못해 허락해주더군.



배를 타고 보니 생각하지 못했던 좋은 점들이 있더군. 평소에는 조선 사람들과 얘기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승객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었다네.



지금은 밤 12시가 넘었네. 술도 한 잔 했는데 잠이 오질 않는군. 아마 오늘 있었던 일 때문인 것 같아. 갑판에 나와 바람을 쐬고 있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다가와서 내 옆에 앉더군. 과일까지 깎아주며 친근하게 말을 붙이는 것이 뭔가 목적이 있어 보였네.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네.



아주머니 : 한스 선생님 이것 좀 더 드십시오.



한스 : 아휴, 많이 먹었습니다. 아주머니 드십시오.



아주머니 : 자, 자, 사양하지 마시고 더 드십시오. 조선에서 생활하시기가 어렵진 않습니까?



한스 : 괜찮습니다. 지낼만합니다.



아주머니 : 언제까지 조선에 계실 겁니까?



한스 : 글쎄요. 아직 확실하진 않습니다.



아주머니 : 아까 배에다 싫은 물건들이 죄다 의약품들 맞습니까? 양이 엄청나게 많던데… 한스 선생이 직접 사신 건 아니죠?



한스 : 아닙니다. 제가 활동하는 단체에서 지원해 주는 겁니다. 근데 왜 그러시죠?



아주머니 : 아니,,, 다른 게 아니라, 오해 없이 들으십시오. 의약품들이 아주 많던데, 혹시 남는 약품들이 있으면, 나한테 좀 팔았으면 해서 말입니다. 중국제 의약품은 구하기 쉬운데, 서양에서 물 건너 온 것은 중국에서도 귀해서 말이죠. 가격은 잘 쳐드릴 테니 한 번 잘 좀 생각해 보십시오.



한스 : 무슨 소리입니까. 저 의약품들은 제가 마음대로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리고 조선 인민들을 치료해 주라고 국제사회에서 지원해준 것이지, 상품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주머니 : 아휴 누가 아니랍니까? 압니다. 잘 알지요.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 같은 장사꾼한테 약품을 파는게, 정말 아픈 사람들을 돕는 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 약들이 병원에 가봐야, 이놈 저놈이 달라붙어서 팔아먹을 텐데, 그러다 보면 결국 나 같은 사람들 손에 들어온단 말입니다. 여러 사람 손을 거치다 보면 약값만 올라가고 결국 피해를 보는 건 평백성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약을 팔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좋은 게 좋은 겁니다.



한스 : 아니 뭐라고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아주머니 : 싫으면 그만이지 그다지나 화를 내고 그래요. 에이, 대신 다른 사람들한테 팔지나 마십시오!



아주머니 얘기를 들어보니, 조선에서는 배급이 끊기면서 장마당이라는 곳이 활성화 됐다고 하더군. 고양이 뿔 빼놓고는 없는 게 없다고 할 정도로 온갖 물건들이 다 있다고 하네. 물론 약도 팔리고 있는데 주로 간부들이 병원에서 빼낸 것이 대부분이라고 하더군. 순간 내 전임자가 남겨 두고 간 의약품이 왜 흔적 없이 사라졌는지 리해가 되더군. 어쩌면 그 아주머니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착잡해지더구만.



멀리 수평선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네. 저녁 생각도 없고, 술 생각이 간절하더군. 김복식은 배 멀미 때문에 줄곧 침대칸에서 나오질 못해서, 하는 수 없이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네. 그때 말쑥하게 차려 입은 중년의 사내가 다가오더군. 혼자 마시는 술이 맛이 없다는 건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아무튼 이 박명수라는 사람과 연거푸 술잔을 주고받았네. 그는 함북도에서 남포항까지 목재운반사업을 하고 있는데, 중국으로 출장을 갔다 오는 길이라고 하더군. 젊었을 때는 로씨야로 류학도 다녀온 적 있다는데, 얼핏 보기에도 인테리 같았다네.



저녁식사 시간이라 그런지 갑판에는 우리 둘 밖에 보이지 않더군. 게다가 술이 들어가서였을까? 박명수가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네.



박명수 : 한스 선생, 난 당신 같은 사람을 보면 부끄럽습니다. 아니, 솔직히 자존심이 상합니다. 우리 조선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됐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한스 : 조선도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겁니다. 사람이 어떻게 자연재해를 막겠습니까? 이번 고비를 잘 넘기면 될 겁니다.



박명수 : 이것이 자연재해라고요? 북조선 하늘에만 구멍이 뚫렸답니까? 중국도 멀쩡하고 남조선도 멀쩡한데.....



한스 : 듣고 보니 그렇군요.....



박명수 : 언제 한번 함북도 쪽에 와보십시오. 정말 눈뜨고는 차마 못 볼 지경입니다. 거리에 시체가 나뒹굴고, 열 집에 한 집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스 : 신문기사들이 틀린 건 아니었군요. 상황이 그렇게 안 좋은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평양의 상황이 그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박명수 : 평양은 정말 선택 받은 곳입니다. 평양과 지방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배급 나오는 것도 그렇고 사람들 살림살이도 그렇고, 평양에 산다는 것 자체가 특권입니다. 내 가족들도 평양에 살고 있지만, 일 때문에 북쪽 지방에 가면 그 처참함에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한스 : 언제부터 조선이 힘들어 진겁니까?



박명수 : 수령님이 살아계실 때만해도 이러진 않았습니다. 이밥에 고깃국은 못 먹어도 배급이 끊기진 않았죠. 믿고 따라갈 당도 있었습니다. 로씨야에서 류학을 할 때만 해도 조선 사람이라는 게 정말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억이 막혀 말이 안 나옵니다.



한스 : 자연재해 때문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그런 겁니까?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박명수 : 나도 모르겠습니다. 뭐가 잘못된 건지.. 곧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술이나 더 마십시다.



독한 중국 흰 술을 두 병이나 마셨더니 꽤 취하더군. 저녁식사 시간이 끝났는지 사람들이 갑판으로 나오는 바람에 우리 둘의 술자리도 자연스럽게 끝이 났네.



내 방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주머니의 제안도, 박명수의 한탄 섞인 이야기도 모두 조선의 지금 모습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네. 내가 조선에 대해서 너무 단순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는데, 자네한테 편지를 쓰면서 좀 정리가 되는 것 같군. 일단 평양으로 돌아가 상황을 재정비하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생각이네. 약품관리도 잘하고 말일세. 그리고 박명수의 말이 사실이라면 함북도로 가서 활동해 보고 싶군.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는게 내가 조선에 온 목적이 아니겠나?



이젠 앞으로 열심히 활동할 일만 남았네. 건투를 빌어주게나.



1999년 6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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