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으로 본 세계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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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과 말하는 도구 노예들

사건으로 본 세계력사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4




안녕하십니까? 과거로부터 현재를 리해하고 그 현재를 통해 미래를 배우는 ‘사건으로 본 세계력사’ 시간의 송현정입니다. 오늘은 그 열세 번째 시간으로 ‘로마제국과 말하는 도구 노예들’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여러분들 혹시 고대 로마시대의 ‘검투’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나요? ‘검투’란 노예 가운데 체격이 좋고 건강한 사람들을 골라 무술훈련을 시켜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서로 싸우게 해놓고, 그것을 즐기는 놀이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때 검투를 하게 되는 노예들은 상대방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했으므로 그야말로 일회적인 소모품정도로 취급받았습니다. 고대 로마 시민들은 거대한 원형극장에 모여 검투사들이 피를 흘리며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을 보면서 환호성을 지르곤 했습니다. 이들에게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으며, 검투는 닭싸움 정도의 오락이나 운동경기로밖엔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데 기원전 73년, 이 노예들이 강대한 로마를 뒤흔드는 일대 사건을 일으킵니다. 바로 대규모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이죠. 이 봉기의 지도자는 스파르타쿠스라는 검투사였습니다.스파르타쿠스는 발칸반도 동부에 위치한 뜨라끼야 출신으로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로마로 끌려왔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이 뜨라끼야의 왕자였다고 하네요. 노예가 된 그는 광산에서 일하다가 카푸아라는 곳에 있는 검투사 양성소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양성소의 가혹한 훈련과 생활을 견딜 수 없었던 스파르타쿠스는 기원전 73년, 7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그곳을 탈출하여 베수비오스 산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기지삼아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의 가혹한 채찍도, 비인간적인 대우도 없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새 보금자리에서 그들은 미래를 위해 싸울 준비를 해나갔습니다. 베수비오스 산 남쪽의 캄파냐 지방에는 대농장이 많았는데요, 때마침 기근이 들어 노예와 파산한 농민들이 속속 스파르타쿠스의 대렬에 합류했습니다. 이렇듯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봉기군은 단순한 도망노예들이 아니라, 귀족과 노예소유주들이 판치는 로마를 뒤엎고 새로운 사회를 세워보려는 희망을 지닌 사람들로 변해 있었습니다.



기원전 72년 봄이 되자, 봉기군은 12만 여 명으로까지 늘어났고,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습니다. 이에 로마는 4개 군단을 투입하지만 스파르타쿠스 군대는 이들을 격파하고 이딸리아 북부의 포 강 일대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봉기군은 여기서 다시 남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포 강 일대의 자유농민들이 강력하게 저항한데다 장마철에 접어들어 더 이상 전진하기 어려웠던 탓이었죠. 그리고 기원전 71년, 메시나 해협을 건너 시칠리아로 가려던 봉기군들은 같이 싸우기로 한 그리스 인들의 배반으로 로마의 포위망에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토벌군들의 추격을 받던 이들은 아폴리아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봉기군의 주력부대가 전멸 당했으며, 패주한 5 천여 명도 폼페이우스에 의해 전멸당하고 말았답니다. 포로로 잡힌 6천여 명은 십자가에 매달려 처참하게 죽어갔는데, 그 죽음의 십자가 행렬은 무려 수십 리에 달했다고 전해집니다. 스파르타쿠스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아마도 전사했거나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으리라고 추측되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번영 뒤에는 생산 활동을 담당하고 있었던 수십만 명의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농장, 광산뿐 아니라 가내반에서 일하는 노예들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수위, 료리사, 리발사, 심지어는 의사까지도 노예들의 역할이었습니다. 녀자 노예들은 한층 더 비참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낮에는 쉴 새 없이 일을 하고 밤에는 주인의 성적 희롱의 도구로 리용되었습니다. 로마사람들은 사람이 사용하는 도구를 세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수레나 삽처럼 소리를 내지 못하는 도구, 소나 말처럼 소리를 내는 도구, 그리고 노예처럼 말하는 도구 이렇게 말이죠. 노예가 수레나 가축과 다른 점은 ‘말할 줄 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노예의 공급원은 주로 전쟁이었는데, 고대 로마의 최고 지도자로 꼽히는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 때 무려 100만 명의 노예를 얻었다고 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1세기의 이딸리아에서는 총인구 450만 명 중에 150만이 노예였다고 합니다.



로마의 노예봉기는 스파르타쿠스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봉기들과는 달리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는 로마 본토에서 일어나 3년 동안이나 이딸리아 남부를 장악하고, 로마와 팽팽히 맞서 싸운 일대 무장투쟁이었습니다. 스파르타쿠스의 영웅적인 투쟁은 로마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기에 충분했습니다. 그의 이름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며 력사에 기록된 것도 바로 그런 까닭에서일 것입니다.



사건으로 본 세계력사, 제13화 ‘로마제국과 말하는 도구 노예들’을 마치겠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제14화 ‘예수, 십자가에 못박히다’를 보내 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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