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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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지하 조사실, 서른 세 번째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2-09-12 19:39


가족생각과 옛 생각을 하다나니 중학교 다닐 때 있었던 일이 문득 생각났다.



우리 반에 날씬하고 깨끗하게 생긴 데다 공부도 잘 하는 ‘구지향’ 이라는 동무가 있었다. 집도 동네인 하신동 32호동 아파트 1층에 살았는데 그의 삼촌이 ‘평양 아동백화점’ 지배인이어서 그 집에서는 당시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흑백 tv가 있었다. 항상 간식도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저녁이면 그 집에 놀러가 텔레비젼도 보고 캬라멜도 받아먹곤 했다. 남동생들도 다 공부를 잘해서 학교 소년단 위원장이었다.



1960년대 말에 하신동 아파트 구락부에서 각 동별로 연극을 했는데 그때 구자향의 어머니는 미군 역을 했고 우리 어머니는 안전원 역을 했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구자향의 어머니가 뚱뚱해서 미국놈 역에 적격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1974년경 어느날 구자향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동네 아주머니들은 모여서 숙덕거렸다. 수군대는 말에 의하면 구자향의 남동생이 자기 어머니를 간첩이라고 사회안전부에 신고를 했다는 것이었다. 사회안전부에서 수사한 결과 부모, 삼촌 모두가 간첩임이 밝혀졌다는 이야기였다. 그 뒤 구자향은 동생들과 함께 하루아침에 양강도 수용소로 쫒겨 갔고 시집간 언니 식구까지도 모두 쫓겨갔다.



동네 사람들은 자기도 그 집과 친하게 지냈는데 혹시 그 영향이 미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어린 나 역시 그 집에서 tv 보던 일과 캬라멜을 얻어먹은 일 때문에 잘못 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별일 없이 그 일이 수습되어 구자향을 잊을만 해졌을 때 구자향과 친한 애가 나를 살짝 불렀다. 그 애는 구자향에게서 어떻게 편지를 받았는지 나에게만 보여 주었다.



애들만이 쫓겨 와 죽든 살든 수용소에 버려져 있단다. 농사를 짓고 있는데 난생 처음 해보는 낫질에 손을 베고 호미에 손을 다쳐 말이 아니야.



나는 그 편지를 보고 수용소로 쫓겨 가는 생활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았고 새가슴처럼 벌벌 떨림을 느꼈다. 이런 일은 북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누구는 말을 잘못해서, 누구네 집은 외국 유학간 아들이 외국 여자와 연애를 했다 해서 그 가족이 모두 하룻밤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기 때문에 북에서는 아주머니들이 남편의 음주를 제일 걱정한다. 이곳에서는 남편의 건강 때문에 과음을 걱정하지만 북에서는 그런 고급스러운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다. 혹시 남편이 술김에 말을 잘못할까봐 노심초사였다. 만약 남편이 저녁에 술 먹을 일이 있다고 하면 부인들은 말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전 가족이 피해를 보게 되니 항상 걱정이었다.



북조선이 이런 사회인데 내가 이 엄청난 비밀을 말하고 나면 우리 가족이 어떻게 될지는 뻔한 일이었다. 밤새도록 어머니, 아버지, 현수, 현옥이, 그리고 외갓집 식구들 얼굴이 번갈아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느 얼굴 하나도 나로 인해서 피해를 당하게 할 수 없는 얼굴들이었다. 어머니의 우시는 얼굴, 아버지의 침통한 얼굴, 현수의 원망에 찬 얼굴, 현옥이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또 다른 다정한 그들의 얼굴과 겹쳐 떠올랐다.



내가 본 서울 거리가 잘못 본 외부적인 현상일 뿐이기를 빌었다. 북에서 듣기로는 서울 거리는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해놓았지만 뒤로 가면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렇지만 거리에 넘쳐 밀려다니는 자동차의 물결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거리에 나다니던 행인들의 화려한 옷차림은? 밝은 표정은? 환상을 본 것은 분명 아니었다. 한강에 놓인 다리만도 10개가 넘는다니 도무지 북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강변에 줄지어 서 있는 아파트는 평양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아파트 마당에 빽빽이 세워진 승용차는 이들의 넉넉함을 자랑하는 듯했다. 놀라움과 더불어 내가 수행한 전투 임무에 대한 의구심이 또한 나를 괴롭혔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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