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으로 본 세계력사

  • 방송정보 | 종영방송
  • 출연진행:

공식 SNS

십자군전쟁의 시작

사건으로 본 세계력사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5






안녕하십니까? 과거로부터 현재를 리해하고 그 현재를 통해 미래를 배우는 ‘사건으로 본 세계력사’ 시간의 송현정입니다. 오늘은 스물여섯 번째 시간으로 ‘십자군전쟁의 시작’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십자군 전쟁처럼 가장 성스러운 이름에 가장 세속적인 욕망이 결합된 전쟁이 없고, 신의 이름을 빌어 략탈과 살인, 만행이 판을 친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 전쟁의 발단은 예루살렘이었는데요, 예루살렘은 유대인, 기독교인, 회교도인 공동의 성지였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교를 확립했던 다윗의 우물이 있는 어머니의 도시요, 기독교인에게는 예수가 죽어 부활한 곳, 회교도에게는 회교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머무른 곳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셀주크 투르크인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셀주크 투르크 인은 중앙아세아 일대에서 일어난 민족으로서 회교를 받아들여 세력을 급속히 팽창시켜, 1055년 무렵부터는 회교 세계의 실력자로서 수리아, 팔레스티나, 소아세아에 걸친 대제국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셀주크 투르크인은 다른 회교도와는 달리 기독교인이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오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전까지 자유롭게 성지를 순례하고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장사를 하던 기독교인들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로마의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원조를 요청했습니다. 셀주크 투르크가 교회의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하더니 자꾸 심상치 않은 기색을 보이니, 같은 기독교 세계에 속하는 형제께서 좀 도와주십사 하는 내용이었죠. 이에 1095년 11월, 우르반 2세는 회의를 열고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즉 교회의 상징인 십자가를 수호하는 군 파병을 제창했습니다. 그는 동로마제국을 비롯하여 예루살렘이 있는 서아세아까지 로마교회의 세력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죠. 그리고 유럽의 군주들은 경제적인 실리를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꺼이 전쟁에 응했습니다. 그리고 기사들도 전쟁을 통해 경제적 리익을 챙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십자군에 지원했습니다.



1096년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향해 떠났습니다. 십자군은 고대 수리아의 수도였던 안티오크를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었습니다. 이 무렵 ‘마라의 학살’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기사 보에몽이 이끄는 십자군 부대는 마라성에 도착하여 목숨이 아까운 사람은 궁전 안으로 피난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그런 다음 성안으로 진격해서 닥치는 대로 략탈과 살륙을 자행했습니다. 회교도인이나 남녀로소를 가리지 않고 죽였으므로 성안은 시체로 뒤덮여 산을 이룰 지경이었습니다. 게다가 궁전 안에 피난하고 있던 회교도가 아닌 사람들까지 공격해서 소유물을 빼앗고 살아남은 사람은 노예로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더 충격적인 사실은, 마라성에 머문 지 1개월이 지나 식량이 떨어지자 보에몽 부대는 회교도인을 죽여 톱으로 배를 갈라보기도 했습니다. 회교도인들이 금은보화를 삼켜 뱃속에 간직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답니다. 또 죽은 회교도인의 고기를 료리해 먹기도 했습니다.



사실 십자군의 략탈과 만행은 마라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이들은 계속 전진하여 1099년 6월 예루살렘에 도착했고, 6주간 계속된 전투 끝에 예루살렘을 손에 넣었습니다. 여기서도 십자군은 적군은 물론 주민들까지 모조리 죽였습니다.



이후에도 예루살렘을 두고 로마교회와 회교 사이의 전쟁은 모두 7차례 더 일어났는데, 그 중 성지탈환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것은 1차 십자군원정 뿐이었습니다. 원정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종교적 목표가 사라지고 세속적인 리해관계가 개입된 것이죠. 결국 2백 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와 교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믿지 않게 되었죠. 전쟁에 참가했던 봉건 령주와 기사들은 자신들의 령지를 돌보지 않아 몰락을 길을 걷기 시작했고, 반면 전쟁으로 많은 돈을 번 상인들과 그 상인들과 손을 잡은 왕의 권한이 강해지면서 영국과 프랑스처럼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는 나라들이 생겨났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중세사회가 지닌 힘을 분출시킨 사건인 동시에 봉건제도의 기초를 뒤흔들어 다음에 올 새로운 사회질서를 준비하는 서곡이기도 했습니다.



사건으로 본 세계력사, 제26화 ‘십자군 전쟁의 시작’ 편을 마치겠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제27화 ‘중세문화의 꽃, 대학’을 보내 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전체 0

국민통일방송 후원하기

U-friends (Unification-Friends) 가 되어 주세요.

정기후원
일시후원
페이팔후원

후원계좌 : 국민은행 762301-04-185408 예금주 (사)통일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