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으로 본 세계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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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족 유럽을 석권하다

사건으로 본 세계력사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5




안녕하십니까? 과거로부터 현재를 리해하고 그 현재를 통해 미래를 배우는 ‘사건으로 본 세계력사’ 시간의 송현정입니다. 오늘은 스물두 번째 시간으로 ‘게르만족, 유럽을 석권하다’를보내드리겠습니다.



지난시간에 우리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유럽의 새 실력자로 떠오른 것은 스칸디나비아에서 이주해 온 게르만족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게르만족이 세운 국가들 중 가장 강력한 나라가 프랑크 왕국이였습니다. 유럽 중앙을 흐르는 라인강 하류에 정착한 프랑크족은 이딸리아 북부, 프랑스, 벨지끄 일대로 세력을 넓혀 5세기 말, 프랑크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오늘은 게르만 부족들을 정복 통합하고, 유럽의 정치적, 문화적 통일을 실현한 프랑크 왕국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당시 서로마 제국은 무너졌지만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었는데요, 6세기 말 경에 이르러서는 로마 교회를 관할하던 대주교가 ‘교황’이라는 칭호를 갖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와 겨루며 기독교 전체를 장악하게 됩니다. 게르만 인들은 로마로 이주해 오기 전부터 이미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으로 기독교로 종교를 바꾼 상태였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여러 계파가 있었는데요, 게르만 인들은 대부분이 로마 교회가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는 아리우스 파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프랑크 왕국의 초대 왕이였던 클로비스는 다른 게르만 왕들과는 달리 아타나시우스라는 종파로 개종하여 로마 교회의 지지를 얻었고, 그 힘을 빌어 령토확장에 성공했습니다. 그가 죽은 뒤 내부을 수습하고 실권을 장악한 사람이 카롤루스 카르텔이고, 그 아들 피핀은 751년 왕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이 피핀의 아들 카롤루스 대제에 이르러 프랑크 왕국은 유럽 최강의 왕국으로 성장했고, 이 때 카롤루스 대제와 교황 레오 3세 사이에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로마교황은 동로마 제국의 간섭과 보호아래 있었습니다. 교회의 우두머리인 교황은 로마제국 전체의 정신적 지도자로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동로마제국의 황제와 사사건건 부딪치고 있는 형편이였습니다. 그래서 교황은 새 후원자가 필요했습니다. 이 때 가장 적절한 인물로 떠오른 것이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였고, 카롤루스 역시 유럽 전체를 석권하려면 교황을 무시할 수 없었으며 그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카롤루스 대제와 교황사이에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죠. 800년, 교황 레오 3세는 카롤루스에게 서로마 제국 황제의 제관을 씌워주었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의 후원자가 일개 국가의 왕이 아닌 ‘황제’라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의 서로마 제국 황제 즉위는 유럽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로써 서로마를 무너뜨린 당사자요 침입자였던 게르만인이 유럽의 새 주인으로 당당히 인정받게 되였고, 프랑크 왕국은 교황의 수호자요 서로마 제국의 계승자로 자처하게 되였으며, 게르만 문화와 로마 문화, 기독교가 융합된 중세 서유럽 문화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서로마 제국은 부활되였으나, 그 주인은 바로 로마를 무너뜨린 당사자 게르만 인이였습니다.



사건으로 본 세계력사, 제22화 ‘게르만족, 유럽을 석권하다’를 마치겠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제23화 ‘반은 노예, 반은 농민’을 보내 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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