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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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2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 황장엽은 평양을 떠나 모스크바 종합대학 철학연구원에 입학합니다. 모스크바에 온 조선유학생들은 매일 저녁 조선혁명과 관련된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두각을 보이면 금세 유명해졌기 때문에 학생들은 팽팽히 맞서며 자기주장을 펼쳤습니다.





나는 이 토론회에 한 차례 참석했다. 그러나 토론회가 너무 정치적이라고 판단하고는 다시는 참석하지 않았다. 내가 소련에 유학을 간 목적은 소련의 발전된 이론을 배우려는 것이지 조선의 정치를 배우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행동에 대해 뒷말이 많았다. 내가 토론에 참가할 만한 실력이 없기 때문에 토론회를 기피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 소문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의 준비 정도로는 토론회에서 빛나는 의견을 내놓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나는 빠른 시간 내에 러시아 학생들을 따라잡기 위해 공부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한 성실하고 실속 있는 공부를 하느라 토론회 따위는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공부하는 대학에도 존경하는 사람의 정신이 아니라 외모를 흉내내려는 사람이 간혹 눈에 띄었다. 한 철학부 학생은 자기가 마르크스와 같은 천재라고 떠벌리면서 수염도 깍지 않고 담배를 많이 피웠다. 마르크스가 담배를 많이 피웠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지만 그 친구처럼 많이 피웠는지는 의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주의 사회가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선 민족차별이 없고 서로 도와주려는 도덕적 기풍이 강하며 허례허식이 없고 솔직한 면이 나를 끌어당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평양의 공산주의를 약간 맛보고 온 나로서는 30년의 세월을 거쳐 자리가 잡힌 러시아를 흠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와 동갑이었던 노어선생은 소련과 독일이 싸울 때 남편한테 버림을 받았다고 했다. 생긴 게 어찌나 날카로운지 인정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나는 그녀가 나를 조선인이라고 깔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발음이 나쁘면 가차 없이 반복시키는가 하면 나를 보통학교 학생 다루듯이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가 보기보다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는,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여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 생각대로 그녀는 나의 노어실력을 높여주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다. 눈앞에서는 아무런 칭찬을 하지 않았지만, 다른 선생들에게는 내가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내 칭찬을 한다는 걸 알고는 몹시 부끄러웠다. 그녀는 문학분야에서도 상당한 독서량을 갖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녀에게 이성으로서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으나 인간적으로 친근감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나와 극장에 함께 가기를 좋아했다. 특히 고전을 다루는 연극을 자주 보았는데, 그 내용을 두고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사상적으로 더욱 깊이 친해지게 되었다. 늘 그녀가 표를 샀고, 또 생활이 넉넉지 못하면서도 나에게 초콜릿이나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는데, 그 모든 행동이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나와 노랑머리 선생이 연애를 한다며 동무들이 놀려대기도 했지만, 나는 문제 삼지 않았다.



어느 겨울날이었다. 눈이 오고 있었는데, 그녀가 크레믈린 앞 광장을 같이 걷자고 했다. 나와 그녀는 서로의 팔짱을 끼고 걸었다. 걸으면서 그녀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건 이성적인 것이 아닙니다. 내 사랑은 진실로 당신을 존경하는 사랑입니다. 나를 이해하고 앞으로도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그 후에도 우리는 계속 만났고, 어떤 때는 그녀 집에 초대되기도 했다. 집에는 그녀의 어머니와 나타샤라는 여섯 살 난 귀여운 딸이 있었다. 나타샤는 나를 무척 따랐다. 나는 그녀의 고독한 생활을 동정했으며, 내 신변과 관련한 문제를 그녀와 상의하곤 했다.



나와 여선생 간의 친교는 4년 동안 변함이 없었고, 내가 귀국한 다음에도 그녀에 대한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1960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공산당대회에 참가했다가 그녀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 눈물을 글썽이며 반가워했다. 우리는 한참을 얘기했는데, 그녀는 소련사회가 점점 물질만능으로 변해간다면서 개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 늘어난 것은 텔레비전이라면서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너무 좋아해서 정신적으로 천박해져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학 도서관에도 자주 갔는데, 그곳에는 나이 든 아주머니들이 우리의 신발과 외투를 보관했다가 내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세월이 가면서 그녀들과도 친해졌다. 그래서 내가 다른 일을 하느라고 한동안 나타나지 않다가 보이면 반가워 말을 시키곤 했다.



“뭐 하느라고 오늘에야 나타났어요?”



그러면서 어떤 책이 나왔는데 꼭 읽어보라거나, 자기 집에서 일어난 얘기를 해주고는 했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처음으로 인간다운 대우를 받으며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에 대해서만은 찬동하지 않았고, 그 후에도 겉으로든 속으로든 반대해왔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만은 지난날의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우월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인류의 미래는 사회주의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2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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