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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로동당 국제담당비서 황장엽 망명 사건 8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9 21:05




중국과 남조선 정부는 오랜 교섭 끝에 황장엽을 제3국으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황장엽은 북경의 남조선 총령사관을 빠져나와 3월18일 필리핀행 비행기에 오르는데....



황장엽은 필리핀에 도착한 즉시 비밀숙소로 이동했습니다. 숙소는 철저한 보안조치로 겹겹이 보호되여 있었고 필리핀 군대의 사단장이 그 책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황장엽이 필리핀에 도착한 다음날인 19일 라모스 필리핀 대통령은 “남조선과 필리핀의 우호와 아세아. 태평양 지역의 평화-안전보장 차원에서 황장엽 일행의 체류를 허용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4월1일에는 황장엽의 필리핀 체류 일정을 예고하는 발언이 나왔습니다. 필리핀의 시아손 외무장관이 ‘남조선이 중국 측의 한 달간의 체류 요구를 수용한 것으로 믿고 있다’고 언급했는데, 이것은 중국의 립장을 살려주기 위해 한 달을 채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했습니다.



북경에서는 황장엽의 움직임이 언론에 로출되였던 것과는 달리, 필리핀에서는 당국의 배려로 전혀 로출되지 않았습니다. 황장엽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고, 북조선에서처럼 새벽 5시에 일어나 자정이 넘어서야 잠자리에 드는 규칙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한 달이 지났습니다. 4월20일 오전, 경호요원이 황장엽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경호원1 : 선생님,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황장엽 : 네, 됐습니다.



경호원1 : 저격이 있을지 모르니 방탄조끼를 받쳐 입으셔야 합니다.



황장엽 다 됐습니다. 출발합시다.



경호원2 : 출발한다. 대기하라.



필리핀과 남조선의 비밀요원들의 경호 속에 황장엽은 직승기와 승용차를 번갈아 타고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는 필리핀 정부가 제공한 보잉 707기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필리핀에는 북조선이 무기를 지원하는 비밀 공산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북조선의 적극적인 사주가 있다면 얼마든지 황장엽을 암살할 수 있는 테로조직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완전무장한 필리핀과 남조선의 비밀요원들은 비행기 내에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비행기가 활주로로 진입하기 위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안해와 세 딸, 아들과 손자들의 얼굴이 황장엽의 머릿속에 어지럽게 떠올랐습니다. 황장엽은 스스로에게 되물었습니다.



황장엽 : 가족과 동지들을 희생시키면서 선택한 이 길이 과연 바른 길인가. 과연 이토록 엄청난 희생을 보상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



그의 눈이 질끈 감겼습니다.



황장엽을 태운 비행기가 남조선 령공으로 들어서자 남조선의 공군전투기들이 위용을 뽐내며 량 옆에서 엄호를 했습니다. 창문 밖으로 푸른 바다에 둘러싸인 조선반도의 남쪽 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황장엽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1997년 4월 20일, 이렇게 조선로동당 국제담당비서 황장엽이 마침내 남조선에 도착했습니다. 필리핀에 체류한지 33일, 북경주재 남조선 총령사관에서 망명을 신청한지 67일만의 일이였습니다.



지금까지 북조선 최고위층의 망명 사건인 황장엽 사건을 살펴봤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황장엽이 자기 혼자 살아남기 위해 가족들을 사지에 몰아넣었다’고 비난하며 그의 망명의 의미를 깎아 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평범한 인간관계에서 본다면 황장엽의 죄는 씻을 길이 없습니다. 황장엽 자신도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칭하며 ‘자신을 용서하지 말고 가장 가혹하게 저주해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황장엽은 ‘가족의 생명보다는 민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고 단호하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 말 속에 황장엽 망명 사건의 본질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제시대 때 항일투쟁에 뛰어 들었던 독립투사들은 가족들이 희생당할 것을 알면서도 저항을 했습니다. 이들을 ‘자기 신념을 위해 가족들을 희생시켰다’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유태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히틀러에 저항했던, 독일의 반파쇼투사들도 가족들의 생명을 담보로 했기 때문에 비난받아야 하겠습니까? 김정일 독재가 일제시대나 히틀러 독재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로인들이 일제시대보다 더하다고 말할 정도로 김정일 독재는 극악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김정일에게 충성하며 그를 계속 추종하는 것이 옳은 태도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력사와 민족 앞에 돌이킬 수 없는 죄과를 범하는 것이 명백합니다.



황장엽의 고뇌의 시작도, 모든 것을 버리고 망명을 선택한 것도 바로 김정일 독재체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감당해야 할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황장엽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오래도록 생각했습니다. 죽음으로써, 자신이 량심적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가족과 벗들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자살을 하는 것이 가장 편한 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이 수백만의 인민들을 굶겨죽이는 상태에서도 개혁개방을 기어코 거부하고 전쟁준비에만 계속 몰두하는 것을 보고 생각을 달리하게 되였습니다. 특히 내부적으로 궁지에 몰린 김정일이 이를 돌파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조짐을 보이자, 황장엽은 동족상잔의 전쟁이 가져올 민족적 비극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황장엽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남조선 동포들과 손을 잡고 김정일 독재와 싸우다가 죽는 것이 북조선 인민들을 구원하고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 같은 생각은 그가 남조선에 도착한 직후 발표한 성명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황장엽 : 이 모든 조성된 엄중한 사태를 놓고 수십년간 신임 받으며 지내 온 북조선 당국의 고위 간부로서、내외에 많은 벗을 가지고 있는 학자로서、사랑하는 가족과 많은 친우를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생각은 끝없이 복잡하고 고민은 비길 데 없이 심각하였다. 그러나 모든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다 합쳐도 7천만 우리 민족의 생사운명과 바꿀 수 없다는 량심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 출로는 오직 남쪽 형제들과 손잡고 전쟁을 막아 보는 길밖에 없다고 확신하게 되어 남조선으로 오게 되었다.



히틀러에 맞서 싸우다가 죽음을 당한 독일의 반파쑈 투사들의 추모 비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자유와 삶, 명예를 위해 싸우다 죽은 그대들은 력사 앞에서 스스로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김정일 독재와 맞서기 위해, 74살의 나이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길을 선택한 황장엽, 그에 대한 평가는 후세에 력사가 내려줄 것입니다. 지금까지 총8회에 걸쳐 진행한 “조선로동당 국제담당비서 황장엽 망명 사건”을 마치겠습니다.



<추적, 사건과 진실, 조선로동당 국제담당비서 황장엽 망명 사건>, 마지막 시간이였습니다.



<참고 및 인용자료>

- 황장엽 회고록, 시대정신

- 황장엽씨 「서울도착 인사말씀」, 조선일보, 1997-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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