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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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30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1973년, 황장엽이 철봉리 휴게소에서 철학연구를 하고 있을 무렵, 중앙당의 실권은 서서히 김정일에게 넘어갔습니다. 김정일은 실권을 장악하자마자 김일성에 대한 신격화 작업에 들어갑니다. 동상을 세우고, 대대적인 구호나무 발견운동을 전개한 것도 바로 이 때였습니다. 김정일은 또한, 자신에 대한 우상화 높이기사업도 빼놓지 않고 진행합니다.





나는 김정일에게 원산은 거리가 너무 멀어 차라리 평양의 최고인민회의 청사를 이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평양으로 돌아온 나는 김일성을 만나 주체사상에 대한 새로운 글을 발표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주저하면서 말했다.



“내가 마르크스나 레닌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겠소?”



나는 김일성이 왜 그렇게 자신이 없어졌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으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변증법을 근본적으로 개작해야 한다는 내 말에 지레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안 사실은 그것과 전혀 달랐다. 문서정리실에 있던 김일성의 처남이 실장과 짜고 내가 하던 일을 헐뜯은 것이 원인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과는 달리 김정일은 새로운 사상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처남을 좋아하지 않았다. 김정일은 이미 자신의 글을 써주는 집단인 ‘216호실’을 거느리고 있었다. ‘216’이란 자기 생일날을 따서 지은 것이었다. 이 집단은 주로 기자출신들과, 글을 전문으로 쓰지만 학자라고는 할 수 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김정일은 내가 김일성에게 마르크스주의 철학과는 달리 인간중심의 새로운 철학원리에 기초하여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해야 한다고 보고한 것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나는 김정일에게 김일성이 주체철학을 발표하는 걸 주저하기 때문에 당분간 발표될 것 같지 않으니 철학연구는 뒤로 미루고 우선 대학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럼, 황 선생께서 그동안 연구한 모든 자료를 나한테 전부 보내 주시오.”



“알겠습니다.”



나는 3년 반 동안 쓴 주체철학과 관련된 글들을 챙겨 김정일에게 보내 주었다. 그 글 속에는 이미 김일성에게 보고한 것도 들어 있었다. 그 후 나는 대학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최고인민회의 의장이고 그동안 김일성의 지시로 철학연구를 해온 사실을 아는 당 책임비서는 나에게 대학은 제1부총장에게 맡기고 철학연구를 계속하라고 권했다. 당 책임비서는 중앙당 조직부원이었으나 김정일이 직접 파견한 자였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철학연구를 계속하기로 하고 도서관에 나가 주체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하는 작업을 해나갔다. 그즈음 나는 대학에서 으뜸가는 수재로 소문난 철학전문가인 김영춘과 경제전문가인 이국선을 조수로 맞아들여 내 뒤를 받쳐줄 후배들을 키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동무들의 머리는 나보다 열 배는 더 낫다.”



당시 나는 김일성의 아들과 딸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기반이 확고하지는 않더라고 불안해 할 정도는 아니었다. 김일성은 자식들의 교육에 관심을 기울이며 나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김일성의 자식들인 김평일, 김영일, 김경진 등을 위해 자주 특강을 해주었다. 또 김정일의 동생 김경희를 위해서는 아내가 그 집에 가서 살다시피하면서 여러모로 도와 주었다. 나도 이따금 중앙당에 근무하는 김경희를 찾아가 강의를 해주었다.



김정일과 김경희는 이복형제들과 사이가 나빴다. 그래서 양쪽 모두 우리 부부를 끌어들여 자기편으로 만들고자 애를 썼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는 했다.



“우리 부부처럼 교육에 복무하는 사람은 주인집 가정사에는 관여하지 않는 법입니다.”



나는 어느 한편에 서는 걸 사양하면서 양쪽과 두루 좋은 사이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김평일에게는 『삼국지』를 읽어보라고 권하면서, 중국 춘추시대의 제나라 환공의 예를 들어 목숨을 부지하려면 평양을 떠나 멀리 해외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해주었다.



김일성은 권력을 김정일에게 넘겨주면서 사고방식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보였는데, 그가 했던 말들이 그걸 입증해 준다. 이전의 그는 달랐다. 누가 그의 항일투쟁을 폄하하면 솔직하게 받아쳤다.



“우리는 일제와 조금밖에 못 싸웠지만 그래도 안 싸운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런데 왜 그걸 자꾸 헐뜯으려 하는가?”



내가 총장으로 있을 때 학교에 걸린 구호를 보고도 “나에 대한 선전은 점잖게 하는 게 좋다. 노골적으로 하면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또 내가 주체사상의 뿌리문제를 제기하면서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사상을 계승한 것처럼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을 때도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올라갈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김정일이 권력을 잡고는 자기 아버지에 대한 신격화를 다지자, 김일성의 마음도 달라졌다. 먼저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의 묘를 호화롭게 꾸미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기가 막힌 것은 명절 때마다 간부들에게 자기 조상의 묘를 참배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이 무렵부터 김일성은 빨치산 투쟁경력을 기회 있을 때마다 자랑했으며, 해방 전에 이미 소련의 저명한 원수나 장군들과 친분이 있었던 것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해방 전의 김일성은 대위였는데, 그가 어떻게 원수나 장군들과 접촉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가계에 대해서도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일도 신속보다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혹은 선전하기 위해 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30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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