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으로 본 세계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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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이은 최초의 수에즈 운하

사건으로 본 세계력사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9 10:58




안녕하십니까? 과거로부터 현재를 리해하고 그 현재를 통해 미래를 배우는 ‘사건으로 본 세계력사’ 시간의 송현정입니다. 오늘은 예순두 번째 시간으로 ‘바다를 이은 최초의 수에즈 운하’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1869년 세계 교통의 력사상 획기적인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아메리카에서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된 것이고, 또 하나는 에짚트의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것입니다. 특히 수에즈 운하는 지중해와 홍해를 련결하는 대운하라는 의의 말고도, 유럽 선진국들이 본격적으로 아프리카에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당시 에짚트는 오스만 뚜르크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뚜르크로부터 독립하고자 한 에짚트 총독은 영국과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한편 1859년 에짚트 총독은 수에즈 운하 건설이라는 대규모 공사를 일으켰습니다. 프랑스인 리셉스가 그 총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영국은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이 운하가 건설되면 인도양과 아시아로 가는 항로가 대폭 단축되어 식민지 경영이 훨씬 수월해지리라는 생각에서 운하 건설에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공사규모가 워낙 커서 영국의 자본만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아 프랑스에 합작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영국이 에짚트를 장악하면 손해를 볼 뿐이라고 생각하고 합작을 주저했습니다. 그러자 영국 수상 글래드스턴은 에짚트에서 영국이 군사적 행동을 벌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고 겨우 프랑스를 끌어 들일 수 있었죠.



1869년 11월 17일, 착공한지 10년 만에 드디어 운하가 완공되었습니다. 총 길이 162.5키로메터, 바다와 바다를 잇는 세계 최대의 운하였습니다.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영국 런던과 싱가포르 간의 항로는 2만 4천 키로메터에서 1만 5천 27키로메터로 절반 정도 줄어들었습니다. 수에즈 운하는 단박에 유럽 렬강의 관심거리가 되었습니다. 1875년 영국은 에짚트가 재정난에 빠진 틈을 타서 운하회사의 주식을 대거 사들여 사실상 운하 경영권을 장악했고, 그런 다음 서서히 에짚트에 대해 내정간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에짚트 사람들은 이에 반발하였고 1881년 아리비 파샤의 지도하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영국은 군대를 보내 이를 진압하고, 이 기회에 아프리카 남부로 진출하고자 했습니다. 한편, 1883년 나일강 상류에 위치한 수단에서 회교도인들이 에짚트와 그를 배후조종하는 영국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영국은 에짚트 총독 휘하의 군대 1만여 명을 동원하여 수단을 정복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수단의 승리로 끝났고, 에짚트 군은 이 전쟁에서 전멸당하고 말았습니다. 영국은 다시 2년 뒤 수단 정복에 나섰지만 역시 패하고 맙니다. 이때 수단은 영국군의 지도자 고든 장군의 목을 베어 창끝에 매달고 ‘부도덕한 정복자’의 말로라며 공개합니다. 이에 영국은 1898년 옴두르만 전투에서 기관총으로 수단인 1만 1천 명을 무차별 사살하여 고든의 복수전으로 삼았습니다. 그 후 영국은 보어 전쟁을 일으켜 남아프리카 련방을 만들어 식민지로 삼고 케이프타운, 카이로, 칼커타를 거점으로 하는 이른바 ‘3C정책’이라고 불리는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영국의 뒤를 이어 유럽 렬강들은 앞 다투어 아프리카로 진출했습니다. 그때까지 유럽 사람에게는 미지의 세계였던 아프리카 내륙지방에 대한 탐험이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활약한 탐험가로서 널리 알려진 인물은 스코틀랜드의 의사 리빙스턴과 영국인 기자 스탠리입니다. 이들의 탐험기는 유럽인들의 호기심을 부채질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결국 아프리카는 순식간에 서구 렬강의 식민지 혹은 보호령이 되어갔습니다. 프랑스는 사하라 사막을 중심으로 아프리카 서부, 북부, 중부 일대를 장악했으며, 벨지끄는 꽁고를, 이딸리아는 리비아를, 독일은 까메룬과 또고를 손에 넣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에 남은 독립국은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뿐이었습니다.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나라간의 국경이 다른 대륙과는 달리 일직선으로 곧게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유럽 렬강이 아프리카를 분할하면서 정복국의 편의에 따라 마음대로 경계선을 그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아프리카 원주민의 삶은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유럽의 백인이 가져다준 것은 수탈과 노예사냥, 착취와 굴종뿐이었습니다.



사건으로 본 세계력사, 제62화 ‘바다를 이은 최초의 수에즈운하’ 편을 마치겠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제63화 ‘비스마르크의 철권통치’ 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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