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으로 본 세계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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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영국의 아편전쟁

사건으로 본 세계력사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9 10:58




안녕하십니까? 과거로부터 현재를 리해하고 그 현재를 통해 미래를 배우는 ‘사건으로 본 세계력사’ 시간의 송현정입니다. 오늘은 쉰 다섯 번째 시간으로 ‘중국과 영국의 아편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보내드리겠습니다.



1997년 7월 1일. 전 세계의 보도와 신문은 력사적인 기념일로 떠들썩했습니다. 150년 만에 홍콩이 영국으로부터 다시 중국에 반환되는 날이었거든요. 엄연히 중국 땅이었던 홍콩이 어떻게 영국의 손안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일까요? 오늘은 19세기 중국과 영국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9세기 초반까지는 중국과 무역을 하려면 광동이라는 곳에 가야만 했습니다. 당시 중국을 다스리던 청나라가 그곳에서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광동에서도 오로지 정부가 공식적으로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준 상인들, 즉 ‘공행’을 통해서만 무역을 할 수 있었답니다. 그래도 유럽 사람들은 청나라의 물건을 사기위해 몰려들었습니다. 뭘 그렇게 사고 싶어했냐구요? 바로 중국산 비단과 도자기, 그리고 말린 잎을 끓는 물을 부어 우려마시는 차였습니다. 특히 영국이 주로 수입했던 것은 바로 이 중국산 차였는데요, 산업혁명이후 홍차를 마시는 습관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엄청난 량의 중국산 차를 사들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이 수출했던 면직물과 모직물은 중국에서 잘 팔리지가 않았습니다. 이미 우수한 옷감 제조 기술을 보유한 중국은 영국산 방직물을 수입할 필요가 없었고, 더욱이 중국농가에서 만든 직물들이 수입산보다 훨씬 쌌기 때문입니다.



당시 청나라는 은을 화폐대신 사용하는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어서 영국은 이 차의 대금을 거의 은으로 지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영국의 은이 다량으로 청나라로 흘러들어가게 되었고, 그것은 영국에게 막대한 손해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은의 유출을 막기 위해 중국에 뭔가 팔만한 것이 없을까 고민하게 되었는데요, 그렇게 해서 찾아낸 상품이 바로 ‘아편’이었던 것입니다. 영국은 식민지였던 인디아에서 나는 아편을 청나라로 밀수출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청나라는 하루아침에 수입 초과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량의 은이 국외로 흘러나가 극심한 재정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아편중독자가 급증하여 국민들의 건강을 좀먹어 들어갔습니다.



결국 1839년 청나라는 임칙서라는 관리를 황제의 특명을 받은 흠차대신으로 임명하고 군사, 행정상의 전권을 주어 아편밀수의 본거지인 광동으로 파견했습니다. 임칙서는 아편을 몰수해 폐기하고, 영국 상인의 무역을 금지하는 등 강경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당시 꼬박 두 달이 걸려 회수된 아편은 도합 2만 283상자로, 1천 5백만 딸라에 상당하는 엄청난 량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중국의 아편무역 금지조치에 대해 영국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겠죠? 영국은 자유무역을 보장해 달라면서 군대를 파견하여 중국의 해안지방을 공격하였습니다. 때는 1840년 1월 5일.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전쟁은 월등한 화력을 가진 영국이 우세했습니다. 군함 20척, 대포 668문, 무장기선 14척, 포 56문, 보병 만여 명, 포병, 기타 측량선을 거느린 영국함대는 광동, 하문을 공격하고, 다시 양자강 일대로 진출하여 상해, 진강을 함락한 다음 남경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남경은 청나라 경제의 심장부일 뿐만 아니라 이곳을 빼앗기면 청나라는 남북간 교통이 끊겨 반신불수 되는 꼴이 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청나라는 강화를 요청했습니다. 결국 1842년 8월 29일 영국과 중국 청나라는 ‘남경조약’을 맺습니다. 이 조약은 아편배상금 지불을 포함해서 홍콩을 영국에 넘기고, 상해를 비롯해 5개의 항구를 열도록 하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이 남경조약은 일방적으로 영국 측에 유리하게 맺어진 조약이었습니다. 한편 청나라가 다스리는 중국이 허울 좋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고 판단한 미국과 프랑스는 호혜평등의 원칙을 내세워 자기나라와도 조약을 체결하자고 요구했습니다. 그리하여 1842년 각각 망하조약, 황포조약이 맺어졌으며 이후 중국은 서구 렬강들에게 이리저리 뜯기는 반식민지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건으로 본 세계력사, 제55화 ‘중국과 영국의 아편전쟁’ 편을 마치겠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제56화 ‘태평천국 운동’ 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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