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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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로동당 국제담당비서 황장엽 망명 사건 1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9 21:05




김정일과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황장엽 망명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김일성 서기실 리론서기이자 김정일의 스승이였던 황장엽, 그는 왜 가족들과 벗들의 희생을 무릅쓰고 망명을 선택한 것일까요? <추적, 사건과 진실, 조선로동당 국제담당비서 황장엽 망명 사건 >



1997년 2월 12일 오전 9시30분, 북경 주재 북조선 대사관 정문이 열리고 두 명의 남자가 나왔습니다. 그들의 뒤에는 체격이 건장한 경호원 두 명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검은색 외투에 털모자 차림을 한 체소한 70대 로인이 경호원들을 잠깐 돌아보다가 곁에 있는 50대 후반의 남자에게 다짐하듯 물었습니다.



황장엽 : 그러니까 밀가루 1만톤을 주겠다는 사람이 21세기 호텔에 묵고 있다는 말이지.



김덕홍 : 네, 비서 동지.



황장엽 : 어쩐다, 빈손으로 갈 수도 없고...... 그럼 자네들이 먼저 호텔로 가서 기다리고 있게. 나는 잠깐 김 사장과 일을 보고 인차 호텔로 가겠네.



경호원 : 네, 비서동지. 그럼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경호원들은 133번호판이 붙은 북조선 대사관 차를 타고 21세기 호텔로 향했습니다. 경호원이 사라지자 두 사람은 곧바로 택시를 잡더니, 기사에게 ‘삼리둔거리’로 가자고 했습니다. 10분쯤 달린 택시가 삼환북로와 만나는 교차로에서 멈췄습니다.



코끝에 와 닿는 령하 6도의 아침공기는 맵짰습니다. 하지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상쾌했습니다. 백화점과 상점이 밀집되여 있는 삼환북로는 평소에도 복잡한 곳인데, 춘절 연휴가 어제 막 끝난 뒤라 어느 때보다 소란스러웠습니다. 활기 넘치는 거리를 잠시 훑어보던 두 사람은 북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200미터쯤 걷던 이들이 모퉁이를 돌더니 4층 건물 앞에 섰습니다. 건물에는 ‘대한민국 대사관 령사관’이라는 표말이 붙어 있었고, 남조선으로 가기 위해 입국사증을 받으러 온 중국 조선족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습니다.



한편 이른 아침에 북조선의 거물급 인사가 망명할 것이라는 예고를 받은 남상욱 총령사는 직원들을 령사관 정문 앞에 대기시킨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2층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정문을 볼 수 있게 설치해둔 화면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10시 5분경 초초하게 화면을 지켜보고 있는 남상욱 총령사의 눈에 낯선 로인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조선족 남녀들이 주로 드나드는 이곳에 갑자기 출연한 점잖게 생긴 로인의 모습을 본 순간, 남총령사는 아침에 예고된 문제의 인물임을 직감하고, 지체없이 1층으로 뛰어 내려갔습니다. 남총령사는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건물 안으로 막 들어서고 있는 로인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남상욱 : 황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조선로동당 국제담당비서이자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인 황장엽의 망명이 이루어진 순간이였습니다. 황장엽은 최고위급 인사라는 점에서도 충격을 주었지만 그가 북조선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을 리론적으로 체계화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남상욱 총령사는 황장엽과 그와 함께 망명한 조선려광무역련합총회사 사장 김덕홍을 2층으로 안내했고, 이 자리에서 황장엽은 남조선으로 망명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황장엽 : 민족이 분렬되여 반세기가 지났지만 조국을 통일한다고 떠들면서도 서로 적 대시하고 있으며, 북은 남조선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떠벌리고 있다. 이들을 어떻게 제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또 로동자. 농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로동자. 농민을 위한 리상사회를 건설해 놓았다고 선전하는 사람들도 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중략)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결국 우리 민족을 불행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문제를 좀 더 넓은 범위에서 협의할 생각으로 북을 떠나 남쪽 동포들과 협의해 보기로 결심했다.



황장엽은 3쪽 분량의 망명리유서에서 '북조선에 있는 가족들과 모든 벗들에게 자신을 죽었다고 생각하라'는 말을 남겼지만, 가족들과 벗들에게 닥칠 고통을 생각하며 가슴으로 피눈물을 삼켰습니다.



남상욱 총령사가 황장엽의 망명의사를 확인하는 동안 1.5km 떨어진 곳에 있는 남조선 대사관 관계자들이 달려왔습니다. 령사관과 대사관에는 숨막히는 긴장이 흘렀고, 같은 시각 남조선의 청와대, 안기부, 외부부도 발칵 뒤집힌 상태였습니다. 남조선대사관의 정종욱 대사는 서울에서 열리는 해외공관장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날 오후에 비행기로 떠날 예정이였지만 일정을 취소시킨 채 대책마련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본국 정부와 숨가쁘게 론의를 거듭하던 남조선대사관은 11시30분에 중국 외교부에 황장엽의 망명사실을 통보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5시30분, 황장엽의 망명신청 사실을 공개하면서 남조선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겠다고 공식 립장 표명을 했습니다.



남측 정부 : 황장엽 조선로동당 국제담당비서가 오늘 오전 북경주재 대한민국 총령사관으로 망명을 신청했습니다. 우리 정부는 황비서의 망명을.....



이 발표가 나가자마자 남조선 총령사관 주변에는 여러 나라의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총령사관 주변에 경비 병력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7시 45분부터는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7-80명의 중국경찰이 통제선을 사방에 설치하며 철통같은 경계를 섰습니다. 황장엽이 머물고 있는 남조선 총령사관은 밤새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2.5km 떨어진 곳에 있는 북조선 대사관도 자정을 넘겨서까지 불을 환하게 밝힌 채 대책마련에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추적, 사건과 진실, 조선로동당 국제담당비서 황장엽 망명 사건>, 첫 번째 시간이였습니다.



<참고 및 인용자료>

- 황장엽 회고록, 시대정신

- “황장엽 亡命미스터리!”, 월간중앙, 2001년 10월호

- “북 황장엽 망명­황의 북경생활”, 동아일보, 1997-02-15

- “황장엽 귀순 탈출 순간”, 조선일보, 1997.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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