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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3화 국모 김성애가 오던날

등나무집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8




“저게 왜 아직도 여기 있어. 야, 빨리 치우라”



정남이가 대장염으로 봉화진료소에서 입원치료를 받던 어느 날이었다. 병원이 벅적하며 김성애가 소아과를 순찰하러 나온다고 의사 간호사들이 긴장하며 돌아갔다. 할머니는 밀실에서 아기를 감춰가지고 치료하는 중인데 그 밀실이 소아과임에 틀림없었다. 이것이 무슨 일이람. 김성애가 왜 돌연히 소아과 시찰을 하는 것일까. 김주석 다음으로 세도를 부리던 그가 눈엣가시처럼 미워하는 전처의 아들 김정일 비서의 뒷 생활을 조사하기 위해, 즉 정남을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동서금의 역사, 궁중비화를 많이 알고 있던 나의 어머니에게는 별의별 흉조가 늘 예상되고 있었다.



어머니는 겨우 앉아 놀고 있는 손자 앞에 등을 돌리고 “정남아! 할머니 업자. 어서 업자.”아기를 뒷손으로 쓸어 등에 붙였다. 할머니의 손은 떨렸고 가슴은 두 방망이질 하듯 뛰었으며 이제라도 그 세도 높은 국모가 방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설까봐 간호사더러 문밖에 나가 망을 보라고 시켰다.



아기는 평소에 빗자루를 보면 제일 무서워해서 빗자루만 보면 할머니에게 발랑발랑 기어와 품에 머리를 박고 발발 떨곤 했다. 그때... 마치 할머니 뒤쪽에서 빗자루에 쫓기기라도 하듯 급하게 할머니 등에 기어올라 두 손을 할머니 겨드랑이 밑에 꼭 찌르고 납작 엎드리더란다. 아기는 예민했다. 할머니는 급히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업고 명주 포대기로 아이를 덮어씌웠다. 갈 바를 몰라 창가에서 서성거렸다. 그러다 그 여자가 들어와 덮은 포대기를 젖히고 이 애가 누구냐면 어쩐단 말인가.



할머니 눈앞에는 보통강을 끼고 무성하게 늘어선 병원울타리 곁에 있는 포플러 숲이 보였다. 저기로 가서 숨어야지. 할머니는 병원복도로 나가지 않고 베란다를 거쳐 마당으로 내려서는 계단을 허둥허둥하면서 밖으로 나왔다. 포플러 숲에 이른 할머니는 늦가을 마른 잎 새 때문에 앙상한 숲이 아쉬웠다. 어디로 도망칠까. 꼭 자동차를 타고만 통과해온 정문보초를 빠져나갈 수 없었다. 게다가 성애여사가 오셨기 때문에 병원마당에는 호위차들, 군관들, 보위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정남아 자니?”



할머니는 아기 궁둥이를 토닥이며 긴장을 풀기에 애썼다. 아기는 아직 말을 할 줄 몰랐는데 할머니의 부름에 응답하듯 몸을 꼼지락거리며 겨드랑이 밑에 꼭 찌른 손을 잼잼했다. 할머니는 등뒤에서 업은 것도 안심이 안됐다. 뒤에 누가 와서 아이를 뽑아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이를 돌려 앞으로 업었다.



“정남아 일없다. 자 할머니가 있잖니.”



할머니는 손주를 껴안고 낙엽을 와삭와삭 밟으며 더 멀리 더 멀리 발길을 옮겼다.



이것은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수반 김일성의 손자이며 김정일 비서의 장남인 외손자 정남이를 맡아 키운 나의 어머니. 그녀의 30년은 이렇게 애를 뺏길까봐 전전긍긍하는 우매한 봉건황실의 비화에서 출발했다. 그 생활이 영광도 아니고 자랑도 아니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해설: 김성애는 중앙여성동맹위원장이었다. 이 시기 김성애는 김일성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신문과 텔레비죤에서 김일성과 똑같은 크기의 김성애 사진이 실렸다. 김일성이 김성애의 지시는 나의 지시와 같다는 실언을 함으로써 지위가 더 높아진 것이다. 김성애는 중앙당 부장, 책임자들을 호령했고 이들은 그의 말에 순종했다. 김성애 같은 강력한 정적과의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던 김정일에게 정남의 존재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었다.



김정일 비서와 내 동생이 살고 있다는 것은 북조선최대의 극비사건으로 간주되었다. 아버지께도 말씀을 안 드렸다. 처음에는 혜림이가 3호 청사 공작원으로 뽑혀갔다고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짐작하고 계셨다. 단 한 번도 거기에 대해 캐묻지 않으셨다.



이런 거북한 사정 때문에 어머니께서는 6년 동안 관저에서 집에 나오지 않으셨다. 설마 그런 일이 어떻게 한 가정에서 지속되었는가 의문될 수 있으나 온 사방에서 보위원이 우리 식구들의 언행을 탐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살수밖에 없었다.



“요즘에 통 성혜림 동무가 안 보일까?”



“아직 그 소문 못 들었어요.”



“무슨 소문”



“수령님 자제분이 데리고 살고 있데요”



“정말이야!”



명배우 성혜림이 잠적한데 대하여 사회에서는 유언비어가 돌았고 문화예술계, 특히 촬영소 언저리에서는 지도자가 채서 산다는 소문이 속살속살 퍼지고 있었다.



수령과 지도자의 직계에 대한 여론을 엄단하던 보위부와 당 조직들에서 아무리 강권을 써도 사람은 말하고 싶어 하는 동물이다. 조선에서 성씨는 희성인데다가 성혜랑, 성혜림은 부르기 좋은 쌍열매, 예쁜 독버섯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따먹고 죽었다. 쵤영소에서도 나의 직장에서도 사람들이 말질을 하다가 없어지는 수가 있었다. 친구들에게도 거짓말을 해야 되는 나는 사람들을 피했고 혜림이, 어머니 안부를 묻는 하는 사람은 다시 만날까 겁났다. 그러나 이런 것은 실제로 피부에 와 닿는 아픔은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엄마를 잃은 혜림이의 13살짜리 딸애의 가엾음, 엄마의 소식을 들을까 해서 외갓집이라고 찾아와 노여움과 설움에 차서 얼굴이 빨개져 말도 않고 밥도 안먹고 우둘대기만 하다가 반항하듯 뛰쳐나가 버릴 때 속상하던 일. ‘엄마 3호에 갔다’는 허약한 거짓말로는 다 자란 애를 납득시킬 수가 없었다.



해설: 당시 성혜림에게는 첫남편 리평과 낳은 ‘옥돌’이라는 딸이 있었다. 한편 성혜림과 김정일의 동거 사실은 문화예술인 사이에서 먼저 퍼졌다. 김정일은 소문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사고로 위장해 죽이거나, 간첩단 사건을 조작해 정치범수용소로 보냈다. 김정일과 성혜림의 비밀동거 소문은 시아버지였던 작가 이기영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후 이기영은 붓을 꺾어버리고 글 한줄 쓰지 않았다.



정남이가 세 살 때 혜림이는 병이 났다. 이 무렵 자기 아버지로부터 정일이 장가가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혜림은 그에게 결혼할 것을 권고했다. 그래야 아이를 뺏기지 않고 숨어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혜림이 세 살 난 아이를 업고 마당에 있는 복숭아나무 밑에 있는데 정일의 여동생 경희가 왔다.



경희 : 오빠 어딨어요? 빨리 가야 하는데...



오빠를 데리러 왔다는 것이다. 오빠의 색시감을 맞아들이기 위해서인 듯이 암시를 하며... 그때까지만 해도 김 비서는 그런 못할 짓을 혜림의 면전에서 할 수가 없었다.



그날이 잔칫날인줄 알았으련만 지도자는 낮잠만 자고 있었다. 경희가 왔다니까 등을 돌리고 돌아누웠다.



경희 : 가자요, 오빠 가자요



공주는 시뜩해서 오빠를 채근했다. 그녀는 정일을 깨워 데리고 갔다. 혜림은 아들을 업고 살구나무 옆에 어정쩡히 서있었다.



해설: 1974년 김정일은 아버지의 성화 때문에 중앙당집무실 전화교환수였던 김영숙과 결혼했다.



여자를 맞아들였는지 말았는지 혜림과의 생활은 변함이 없었건만 순직하고 외곬이던 혜림은 끝내 못 견뎠다. 불면증, 신경쇠약증, 불안발작, 어머니는 그 애를 모스크바로 치료차 떠나보내시었다. 아이는 어머니가 전적으로 맡으셨다. 나오지 말고 공부를 하라고 권고하시기도 했다.







원작: 성혜랑

극본: 최수연, 리유정

연출: 박은수, 남유진

낭독: 최연수, 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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