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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1화 김정일의 첫 번째 여자 성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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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8




내동생 혜림이는 1949년 서울 사범부속 소학교를 졸업하고 풍문여중에 입학했다. 그리고 전쟁 중에 월북해 평양 제3여중에 다니게 됐다. 혜림은 3학년에 편입하여 소년단 위원장이었다. 학교의 단위원장은 그 학교 소년단의 우두머리로서 각 학교의 학생대표였다. 빨간줄이 세 개 간 소년단 위원장 표시는 길 가던 모든 소년단원이 소년단 경례를 붙여주는 중학생 세계에서는 최고의 빛나는 별이었다. 소년단은 정치성이 생명이던 그 사회에서는 홀시 못하는 정치맹아들이었다. IN소련 삐오델의 전통을 이어 소년단 조직은 제법 관록이 있고 화려한 행사를 갖추고 있었다. 단위원장은 이런 모임에서 단기를 든 기수를 앞세우고 나팔수들의 유려한 나팔소리와 함께 솔로로 등단하고 톱으로 행진대열 앞에 서서 나갔다. 이런 소년단장의 위치도 위치려니와 16살 혜림은 길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쳐다보는 빼어난 미모와 미끈한 체격의 소녀였다.



1952년 3여중을 졸업한 혜림은 김대 예비과에 입학했다가 견뎌내지 못하고 다시 평양 예술학교에 가게 되었다. 그때 예술학교 교원은 거의 서울에서 간 연극인들이었는데 혜림은 단연 그들의 안목을 만족시켰다. 선생들이 고와하고 예술인 집단에 알려져서 혜림은 그 모퉁이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데 점점 너무 날렸다. 아버지 어머니는 자랑스러움보다 불안해 하셨다.



“아휴 곱기도 하지. 우리 며느리로 삼았으면 좋겠네.” “근데 뉘집 딸일까”, “전에 로동신문에서 일했던 김원주 동무 둘째 딸이라고 하던데.”



아들 가진 간부 사모님들이 혜림에게 눈독을 들이던 중 작가 이기영네 집에서 약혼만 하자는 제의가 왔다. 고작 18살이던 혜림에게 말이다. 이기영은 20년대 카프작가로서 그 당시 조선에서는 한설야와 쌍벽을 이루는 원로 작가였다. <땅>, <두만강>등의 작품으로 당의 신임이 높고 인민이 존경하는 조선의 고리끼라는 평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조소문화협회 위원장에 작가동맹위원장이었다.



그 집에서 공부를 끝까지 시킬테니 언약만 하자는 몇 차례 청혼이 왔고, 결국 혜림은 19살에 작가 이기영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해설: 작가의 아들 이일남은 성혜림의 첫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전했다.



이일남 : 이기영의 아들 이평과 결혼한 이모는 처음부터 애정이 없었다. 이모가 영화대학을 졸업할 즈음 이평이 거의 납치하다시피 이모를 데려갔다고 들었다. 이평과의 결혼은 반강제적이었다는 얘기다. 당시는 여자가 애를 가지면 결혼해야되는 걸로 알던시기다. 그런 탓인지 이모와 이평 사이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혜림을 시집보내고 난 어머니는 그 애를 다시 공부시키지 못해 1년 동안 애를 쓰셨다. 어린애를 낳고 시집살이에 파묻힌 혜림이를 어머니는 그때 새로 생긴 연극영화대학에 입학시키지 못해 안달복달 하셨다. 시집에서는 결혼 후에도 공부시키겠다고 약속한바가 있어 반대하지 못했지만 그 당시 북조선에서는 유부녀를 대학에 받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 원칙을 깨고 유일하게 유부녀 대학생이 되게 한 어머니의 노력은 하루에 문화선전성 문을 16번 밀고 다니며 교섭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알 수있다. 연극영화대학은 문화 선전성 산하였다.



연출과를 전공한 그 애는 졸업반에서 예술영화 <분계선 마을에서>의 주인공으로 뽑혔다. IN영화내용은 분계선 마을에 사는 한 월남자의 아내가 자기의 불리한 정치적 처지에서 어떻게 헤어 나와 당을 믿고 꿋꿋이 살길을 개척하는가 하는 줄거리이다. OUT+FO김일성수상이 영화를 높이 평가함으로써 이 영화는 북조선에서 처음으로 인민상을 탔다. ‘조선여성의 전형적 성격창조의 모범’이라는 북조선영화사에 획을 그은 영화였다. 그때부터 혜림은 조선예술영화 촬영소에서 주인공 배우로, 온 북조선이 다 아는 유명배우가 되었다.



그 애는 모양을 낼 줄도 모르고 화장을 할 줄도 몰랐다. 늘 뒷전에만 숨고 말도 잘 안했다. 미장원에 가는 법도 없이 생머리를 동여매고 뒤통수에 올려 큼직한 핀을 질러놓아 수탉꼬리처럼 머리끝이 너풀거렸다. 교태를 모르는 수수한 아낙네... 그러나 북조선 미녀의 총 집결처였던 평양예술영화 촬영소에서도 연출가들은 저마다 혜림을 주인공으로만 집었다.



그 무렵 촬영소에 자주 나와서 영화를 지도하던 김정일이 혜림을 포착했다. 김정일에게 혜림은 초면이 아니었다. 남산고중시절 오토바이를 타고 시끌벅적 이기영네 골목으로 들어서곤했다. 10대의 수상님 아들은 친우의 형수인 열아홉살 새댁을 놀란 눈으로 보았을 것이다. 북조선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비사회주의적인 우아한 새색시, 그가 훔쳐본 뒷덜미는 파마기 없이 되는 대로 틀어 올린 생머리채 밑에서 얼마나 풍성한 젊음과 여인의 가능성을 담고 있었던가. 나는 훗날 밥상머리에서 혜림의 뒷덜미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을 여러 번 포착하곤 했다. 연민과 추억이 묻은 느슨한 눈길....



외인이 오면 부엌에서고 곳간에서고 나서지 않던 수줍음도 좋았고 부득이 맞닥뜨리면 말없이 정중히 왕자대접을 할 줄 알던 그 덕기도 지도자의 눈길을 끌었을 것이다. 아버지를 계모에게 뺏기고 외롭게 밖으로만 돌던 사춘기의 다감한 정일에게 그 형수의 인상은 모성의 향수 같은 것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혜림 동무 정말 수고했습니다. 그 성과를 남기고 왔어요.”



그때까지 혜림이는 많은 영화 주연을 한 중견배우였다. 하지만 토대가 나쁘기 때문에 배우급수도 안올려주고 당원도 시키지 않았다. 꼬투리만 잡으면 비판무대에 세웠다. 그런데 윗분께서 관심을 돌리는 눈치가 보이자 혜림에게 ‘공훈배우’를 주고 입당을 시켰다. 또 외국영화축전에 보내기도 했다. 1968년 프놈펜 영화축제에 갔던 혜림은 돌아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비록영화는 사상선전의 색채 때문에 비난을 받았지만 혜림은 시아누크 친왕과의 사업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던 것 같다. 영화배우로서 그때 연극영화대학출신은 아주 드물었다. 축전에서 혜림이 연기 체험기를 단숨에 써내고 기자 인터뷰에 거침없이 대답하는데 놀랐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때까지도 여배우란 얼굴만 팔아먹는 무식쟁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그 축전에서 시아누크 친왕은 김 주석에게 경의를 표했고 외교관계로 보아 좋은 입장을 표시했다. IN그 당시 영화부문을 높이 지도하고 있던 김정일은 축전결과를 만족히 여겼으며 혜림의 역할을 높이 치하했다. 축전의 정치적 성과를 가지고 자기 아버지에게 좋은 보고를 올릴 수 있었던 그는 혜림에게 절대적 정치적 호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혜림에게 호의, 관심 이렇게 발전하여 결국 반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해설: 혜림이모는 영화 <한 자위단원의 운명>을 끝내면서 이모부와 이혼하고 김정일과 연애를 했던 것 같다. 이모는 김정일과 1969년부터 동거에 들어갔다. 그때 이모는 서른세살이었고 김정일은 스물여덟살이었다. 1970년 이모가 공훈배우칭호를 받을 때는 영화에 출현은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당시 중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이던 김정일의 입김이 작용했는지 또래배우 중 제일먼저 공훈배우칭호를 받았다. 그 해 이모가 정남이를 임신했다.



북의 사회는 사회주의 사상이 그 어느 나라보다도 농도가 짙은 공산국가라 하였지만 전통적인 유교문화권에 속한 윤리관이 지배적이었다. 그것은 수령님 자신이 유교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지식의 기본은 공자의 말씀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자기보다 연상인 유부녀와 가정을 꾸린 김정일 비서는 자유분방한 개성의 체현자라고도 볼 수 있다.







원작: 성혜랑

극본: 최수연, 리유정

연출: 박은수, 남유진

낭독: 최연수, 윤옥

전체 2

  • 2020-05-27 21:53

    성혜림 사진들을 안봐서 잘모르겠는데 우리나라 여자연예인들과 비교하면 결코 미인도 아니었고 평범한 아줌마얼굴이었음~!!!!! 평소의 옷차림도 한결같이 무채색의 한복차림이었으며 화장도 안하고 다녔다고함~!!!!!


  • 2021-07-26 19:35

    이는 성혜림뿐만이 아니라 당시 이른바 1960년대의 북한여배우들이 소수를 제외하면 다 그랬다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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