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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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최고사령관직 찬탈, 그리고 이어진 군부 내의 피바람 3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9 21:04




1970년대부터 김일성에게 서서히 권력을 인계하던 김일성이 마지막 순간까지 내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 인민군에 대한 지휘권, 즉 ‘최고사령관 직위’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1991년 겨울, 급작스럽게 김정일을 최고사령관으로 추대한다고 발표했다. 한 해가 다 끝나가는 12월말에 김일성은 급작스럽게 이런 중대발표를 했던 것일까? 추적, 사건과 진실, <김정일의 최고사령관직 찬탈, 그리고 이어진 군부 내의 피바람>



청취자 여러분, 쏘련의 붕괴가 시작되면서 새어나온 국가안보위원회 즉 KGB의 정보는 영원한 우방이나 친구는 있을 수 없다는 KGB의 론리가 그대로 반영되여 있었습니다. 김정일을 비롯 인민 무력부 보위국 간부들까지 놀라게 한 KGB의 문건 내용을 지금부터 추적해 보겠습니다.



북조선은 현대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무기의 현대화와 함께 군 지휘관의 군사 안목도 넓혀야 한다는 판단 하에, 1985년부터 군 지휘관들을 대거 쏘련 군사대학으로 류학 보냈습니다. 이를 위해 북조선은 장군 양성기지로 불리던 위르실로프 총참모부 아카데미아나 련대장 이상 간부 교육·양성 기지인 프룬제 아카데미아를 비롯해 레닌그라드 군의대학, 전자대학, 공군대학 등 20개가 넘는 쏘련 군사대학과 관련기관에 거액을 지급했습니다. 또한 구동독에도 지휘관들을 류학 보냈는데 1985년부터 1986년까지 내보낸 지휘관 숫자만 해도 무려 700명에 가까웠습니다.



중국과 쏘련 사이에서 줄타기를 계속해온 평양 내부에서 친쏘련계 급진세력이 득세하기를 원했던 쏘련으로서는, 북조선이 이렇듯 현직 군 지휘관들을 대대적으로 류학시키는 상황이 유일무이한 기회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KGB는 군사대학의 2년, 혹은 3년 재학기간을 포섭기간으로 정하고 출세 경력과 군사자질을 갖춘 북조선 류학생들을 상대로 금품매수와 미인계, 협박 등 온갖 수법을 동원해 친쏘련 비밀조직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동아시아 담당요원이 거액을 요구하며 북조선과 흥정한 문건이란 바로 이들의 명단이였습니다. 마침내 이 문건이 김정일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김정일 : 그래, 이게 그 명단이란 말이지.



김정일 : 이봐 원응히!



원응히 : 예,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김정일 : 이 내용이 주석궁으로 들어가선 안 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원응히 : 네!



김정일은 인민무력부 보위국장이던 중장 원응히에게 전후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하면서, 인민무력부가 그동안 대(對)쏘련 정책이 안일하게 운용돼왔다는 데 대한 의견도 첨부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나중에야 알려졌지만, 이는 김일성에게 최고사령관 직위를 요구할 만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였습니다.



6·25전쟁 이후 김일성은 최고사령관보다는 당 총비서나 국가주석의 이미지가 더 강했습니다. 당 군사부도 당 조직부에 구속돼 있는 종적(縱的) 사업원칙상 군사부문에 대한 책임을 김일성이 전적으로 맡은 것은 아니였습니다. KGB 문건을 보고받기 전날까지 절대적인 친쏘정책을 추진해온 것도 다름 아닌 김정일이였습니다.



그 실례로 북조선에 주둔 중이던 쏘련군의 라모나 기지를 들 수 있습니다. 냉전시기 쏘련은 미국의 포위 구상에 맞서는 동아시아 전략의 일환으로 북조선에 쏘련 군사위성 통신결속소를 세우는 방안을 제기했습니다. 1960년대 북조선에서 쏘련군이 완전히 철수한 상황이여서, 김일성은 크든 작든 또 다른 형태의 주둔을 반대했고 쏘련이 기지 후보지역으로 평양시 형제산 구역을 정한 데 대해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러나 이 방안은 결국 김정일이 완강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 수락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도 군사 암호로 ‘208조’로 불린 쏘련 위성 통신결속소 성원들에 대한 김정일의 관심과 배려는 대단했습니다. 208조 단장이던 백러시아 군관구 부사령관 웨리드좌노프 중장을 위해 평양시 중심구역에 호화주택도 짓게 했습니다. 지금은 민주조선사 주필인 김정숙이 거주하고 있는 4·25문화회관 뒤 개인주택이 바로 그 집입니다. 또한 라모나 기지 성원들을 위해, 지금은 인민군 총정치국·총참모부 장령 아파트로 바뀐, 평양시 중구역 고려호텔 뒤 영광동 번화가에 20층짜리 초호화 아파트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1989년 쏘련이 재정적 어려움에 처해 라모나 기지를 철수할 때에는 미림대학 즉 현 김일대학에 나와 있던 40여 명의 쏘련 군사대학 교수도 함께 목란관에 초청하여 북조선 유명 여배우들까지 동원한 최상급 연회를 베풀도록 지시한 사람도 다름아닌 김정일이였습니다. 그간 군사 분야의 친쏘련 정책에 책임질 사람은 바로 김정일이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김정일은 인민무력부 보위국 국장 원응히가 준비한 보고서를 들고 금수산의사당을 찾아갔습니다.



김정일 : 수령님, 동구라파 공산국가들이 붕괴됐습니다. 로므니아 차우세스쿠는 총살당했고 알바니아 당서기장 알리야는 군부 압력으로 쫓겨났습니다. 쏘련마저 붕괴했습니다. 중국도 남조선과 곧 수교를 할 태세입니다. 이제 남은 건 우리 밖에 없습니다. 정세가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빨리 군부를 재정립해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셔야 합니다. 수령님,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와 1991년 8월에 있었던 쏘련의 비상사태와 그로 인한 랭전구도 해체를 새삼 열거하면서,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기 위한 군부의 재정립 필요성을 주장했지만 ‘이제는 내가 군을 쥘 때가 됐다’는 노골적인 요구였습니다. 1991년 12월24일 김일성이 발표한 김정일의 최고사령관 추대 선언은 이렇듯 쏘련 KGB의 작전을 역리용한 김정일의 정치적 수완에 의해 앞당겨진 결과물이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고사령관직을 얻게 된 김정일은 군부 내 쿠데타 조직 척결사업을 리유로 피비린내 나는 숙청 사업을 준비하였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이였습니다.



추적, 사건과 진실 <김정일의 최고사령관직 찬탈, 그리고 이어진 군부 내의 피바람>, 세 번째 이야기를 마칩니다.





*참고 및 인용 자료: 전 북한 핵심 관료 육필수기 3탄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과 ‘6군단 사건’(신동아. 200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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