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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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안전성 심화조에 의한 대학살 사건 1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9 21:04




2만 5천명에 달하는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무자비한 고문과 처형으로 우리 사회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사회안전성 심화조 사건, 이 사건은 김정일이 계획하고 집행한 김일성 측근세력 제거작전이였다. 사건과 진실 시간을 통해 이 사건의 내막을 파헤친다.



청취자 여러분, 사회안전성 심화조 사건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김일성의 사망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김일성의 급작스러운 사망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1994년 7월 8일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인민들의 통곡소리가 울리던 그때 평양의 권력층에선 복수를 다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김일성을 김정일이 죽였다고 보고 있는 김일성의 충성스런 부하들이였습니다. 도적이 제 발 저리다는 말이 있지만, 김정일의 눈에는 몇 안 되는 그들의 수가 몇 백, 아니 몇 천으로 보일 만큼 두려웠던 모양입니다. 당시만 하여도 김정일은 지금과 같이 절대적인 권력을 구축하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김일성의 곁에 있던 최측근들이 가장 무서운 적수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김정일에게 아버지 김일성은 자기에게 권력을 물려준 은인인 동시에 권력불안의 원인이기도 하였습니다. ‘온 사회의 유일적 지도체제 확립’을 위한 10대원칙의 명목을 내세워, 당 내부에서는 사실상 당조직비서의 유일적 지도체제를 굳힌 김정일이였지만, 절대권력을 확립하는 데는 여전히 불안요소가 남아 있었으니, 바로 권력의 요소요소에 박혀 있는 김일성의 측근들 때문이였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은 김일성의 존재 때문에 이들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착수한 일이 김일성과 그 측근들의 련계를 끊고 김일성으로 향하는 당과 국가에 대한 정보를 차단하는 것이였습니다. 먼저 김정일은 김일성을 위하는 척 하면서 사실상 김일성에게 전달되는 모든 정보를 차단하려고 했습니다.



김정일 : 수령님 국가 일은 잘되니 안심하고 말년에 휴식과 독서, 그리고 친지들과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이를 보장하기 위해 김일성의 빨찌산 동지인 ‘혁명의 1세대’ 인물들을 따로 관리하며 주석부와 련결시키는 담당부서도 내왔습니다. 해외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중앙당 통일전선부에 해외조직을 관리하는 조직을 만들고 김일성과 연고가 있는 해외 동포들을 찾는 ‘연고자과’를 신설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한때 신문과 방송에서 중국에 있던 장울화와 량성룡, 그리고 진뢰 등등과 미국에 있는 손원태, 또 쏘련의 노비첸꼬를 불러들여 요란하게 대접하며 김일성이 좋아라고 하던 때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김일성이 옛 동지들이나 만나 휴식이나 취하고 국가 일은 관여하지 말았으면 하는 김정일의 음흉한 계책에서 비롯된 것이였습니다. 이렇게 김일성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두꺼운 제도적 장벽을 친 뒤 뒤에서 김정일은 온갖 권력람용과 전횡을 일삼았습니다.



원래 어렸을 때부터 자기 혼자만을 생각하고 조급한 성미를 가진 김정일의 성미를 잘 알고 있던 김일성의 최측근 부하들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김일성에게 줄을 대여 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김일성에 접근해 국가 정사와 관련해 잘못된 현황을 몰래 보고하군 하였습니다. 이런 리유 때문이였을까요. 한번은 김일성이 국가의 중요간부들을 소집해 다음과 같이 정식으로 통보하기도 하였습니다.



김일성 : 이제부터 당 조직부를 걸치지 말고 모든 중요 현안들을 나에게 직접 보고하라!



김일성으로 향하는 모든 정보를 통제하려는 김정일과 이를 뚫어보려는 김일성 측근들과의 대립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가 있습니다. 중국과 갈등을 빚을 수 있는, 우리나라와 대만의 군사과학자 상호교환 문제를 토의하는 협의회에서 김일성의 고종사촌인 강성산 당시 정무원 총리와 김정일의 의견이 부딪친 일이 있었습니다.



강성산 : 지도자 동지, 이런 중요 문제는 수령님께 보고해서 비준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김정일 : 강성산 동무, 그러지 않아도 과년한 몸으로 피로해하시는 수령님께 우리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부담을 끼쳐서야 되겠습니까?



김정일은 강성산의 의견을 그 자리에서 일축하였지만 자기를 무시한 듯한 강성산의 발언을 잊지 않고 협의회가 끝난 즉시 당 조직부 4과에 강성산에 대한 자료를 묶으라고 호통쳤습니다. 말이 난 김에 중앙당 조직부 4과에 대하여 잠시 알아보겠습니다. 당 조직부 4과는 당 조직부 검열과 중 하나입니다. 김정일이 특별히 관리하는 이 4과는 중앙당과 정무원 고위 간부들의 비행을 색출해 처벌한다는 일명 ‘암행어사’ 부서입니다. 대부분 김정일의 지령으로만 움직이는 이 부서는 음모를 부리는 방법이 너무도 다양하고 엄청나서, 간부들뿐 아니라 당 총비서이자 국가주석이였던 김일성도 가장 싫어하는 부서였다고 합니다. 김일성이 가장 신임하던 사람들 대부분이 이 4과가 만든 자료에 의해 숙청되였기 때문이였습니다.



다시 강성산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결국 김정일은 강성산의 사소한 가정문제를 놓고 그를 가정혁명화로 크게 부각시켜 해임하였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김일성이 “당 총비서로서 당 조직비서에게 당적 경고를 준다”고 버럭 소리치기도 하고 그러고도 분을 삭이지 못해 “어쩌면 제 친인척도 가리지 않는가” 하고 노발대발했지만 권력의 끝자락에 서 있던 김일성의 분노는 김정일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우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우리는 김정일이 자기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고 김일성에게 보고하는 사람들은 다 해임 또는 철직시켜 버리는 안하무인격의 행동을 알 수 있습니다. 김일성의 생존 시기에도 독재권력을 위해서는 제 친인척도 안중에 없던 김정일, 그랬기에 그는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에 본격적인 숙청 활동을 개시하였습니다.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이 가장 먼저 착수한 사업이 바로 권력지반 강화, 즉 김일성 측근 제거였습니다. 그러나 중앙과 각 도, 시에 널려 있는 김일성의 측근 인사들을 단번에 제거하기에는 당 조직부 4과의 힘만으로는 시간적으로나 조직적으로 한계가 있었습니다. 더욱이 김일성이 사망하고 식량난까지 겹쳐 정국이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칫하면 예측할 수 없는 돌발사태가 조성될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굶어죽는 사람의 숫자가 수백만을 넘어서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황해제철소 로동자들의 롱성투쟁과 같은 거대한 반란이 속출하였습니다. 김정일은 황해제철소 로동자들을 땅크를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한편 간부의 요직에 있는 김일성의 측근들을 다 같이 처리할 수 있는 원자폭탄과도 같은 사건, 즉 일대 사상전쟁을 결심하게 됩니다.



추적, 사건과 진실 <사회안전성 심화조에 의한 대학살 사건>, 첫 번째 이야기를 마칩니다.



*참고 및 인용 자료:‘親김일성 세력 제거작업 ‘심화조 사건’의 진상’(신동아. 200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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