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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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친필지시, 전두환을 암살하라 1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9 21:04


2008년 5월 18일 버마의 감옥에서 아웅산 폭탄테로 사건의 마지막 생존자인 강민철이 사망했다. 1983년 테로 사건으로 수감된지 25년만의 일이다. 전두환을 암살할 목적으로 아웅산 국립묘소를 폭파한 공작원들은 1명은 사살, 1명은 교수형, 강민철만 살아남았다가 쓸쓸하게 최후를 마쳤다. 김정일의 친필지시를 철저히 따른 대가였다. 심지어 김정일은 강민철을 남조선 공작원으로 규정하면서 아웅산 테로 사건을 남조선의 자작극으로 몰아갔다. <추적 사건과 진실, 김정일의 친필지시, 전두환을 암살하라>



버마의 수도 랑군에서 북서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인세인’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인세인’은 느리면서도 력동적인 버마 특유의 분위기가 살아 있는 평범한 도시지만 버마 인민들에게는 공포의 대명사가 되어 왔습니다. 버마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인세인교도소’가 이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세인교도소’는 버마 군사정권에 반기를 든 정치범들을 고문하는 감옥으로 악명을 떨쳐 왔습니다. 실제로 교도소 내부에는 정치범만 따로 수용하는 특별감옥이 있습니다. 그런데 버마 정치범들이 수감되는 이곳에 북조선 남자 1명이 살인과 국가모독죄로 20년이 넘도록 수감되여 있습니다. 이 남자의 얼굴은 교도소내 수감자들도 모르며 교도관들 중에서도 일부만이 그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채 버마 당국의 특별감시를 받고 있는 북조선 남성, 그에게는 과연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요?



효과 전환(과거)



1983년 3호청사에 남조선의 소식통으로부터 한통의 첩보가 날아들었습니다. 남조선의 전두환 대통령이 10월 초에 서남아세아 나라들을 순방하며 첫 도착지가 버마라는 첩보였습니다. 대남공작부서로부터 이 첩보를 보고받은 김정일은 눈을 반짝거렸습니다. 1980년 조선로동당 제 6차대회에서 인민들에게 공식적으로 얼굴을 내민 김정일은 이즈음 자기의 공적을 쌓는데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자기 아버지처럼 항일 빨찌산이라는 화려한 경력도 없었고, 조선전쟁이후 파탄난 경제를 재건한 업적도 없었던 김정일로서는 인민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특별한 공적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남조선의 전두환 대통령이 해외순방길에 그것도 버마에 들른다는 소식을 듣자 절로 웃음이 번진 것입니다. 김정일은 김중린 대남담당비서를 급하게 불렀습니다.



김정일 : 비서동무, 이번에 남조선 전두환이 해외순방을 하게 된다는데 좋은 기회가 아닙니까?



김중린 : 무슨 말씀인지....



김정일 : 아니 이번에 전두환이 다니게 되는 나라들에 우리와 아주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나라가 있지 않나 말입니다.



김중린 : 아, 네에. 그렇지요.



김정일 : 어떻습니까. 이번 기회에 전두환을 없앨 수 있다면 남조선은 앉아서 거저 먹은 거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김중린 : 대가리가 없는 몸뚱아리야 우리가 적당히 처리할 탓이 아니겠습니까. 대가리만 없어지면 남조선에 있는 우리 조직들이 나설 유리한 조건도 마련되고, 여러모로 좋을 것 같습니다.



김정일 : 그러게요. 그래. 이번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김중린 : 걱정 마십시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실수가 없도록 철저히 대비하겠습니다.



전두환을 암살하라는 김정일의 지필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지시를 받은 중앙당 3호청사와 인민군 정찰국은 전두환을 암살할 데 대한 안을 만들어 김정일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들이 목표지점으로 삼은 곳은 전두환의 첫 방문지인 ‘버마’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버마를 테로의 장소로 지목했을 까요. 버마는 인종, 언어, 종교가 다른 카친, 카렌, 카레니 등 소수 민족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오랜 내전을 벌려와 정세가 복잡했습니다. 필요하다면 유격대 관련자들을 활용할 수 있는 토대가 구축되여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버마는 북조선과는 오랜 유대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공작원들의 침투가 쉽다는 점도 고려가 됐습니다.



전두환 암살 계획안은 치밀한 검열에 들어갔습니다. 검열 과정에서, 혹시나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전두환 대통령의 방문 예정지인 스리랑카에도 공작원을 대기시켜 둔다는 계획까지 덧붙이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췄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1983년 9월 22일, 랑군항 슐레 6부두에 6천톤급의 북조선 ‘동건애국호’가 나타났습니다.



여1 :동무들 이쪽입니다.



동건애국호에서 내린 세 명의 건장한 남자들은 한 녀성의 안내를 받으며 재빠르게 차에 올랐습니다. 차는 시내중심가인 알론 구역으로 급하게 달렸습니다. 알론 구역에 도착한 녀자는 어딘가를 찾는지 버마 사람들을 붙잡고 연신 길을 물었습니다. 하지만 속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네 사람은 1시간 가까이 헤매다가 물어 물어서 트리엑타 2번가로 들어섰습니다. 막다른 길목에 들어서자 154-A라고 주소가 적힌 집이 나타났습니다. 녀자는 “겨우 찾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집안에서 나온 사람은 놀랍게도 북조선 대사관의 전창휘 정무참사관이였습니다. 이 집은 북조선 대사관측이 임대한 집이였던 것입니다.



전창휘의 집은 막다른 골목에 있어 남들 눈에 띄지 않아 몸을 숨기기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세 명의 남자는 10월 5일까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몸을 숨긴지 이틀째 되는날 한 남자가 방문한 것 외에는 특별히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10월 6일 저녁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열리고 그림자 세 개가 흔들리며 걸어 나왔습니다.



<추적 사건과 진실, 김정일의 친필지시, 전두환을 암살하라>, 첫 번째 시간이였습니다.





*참고 및 인용 자료:



- 아웅산테러 20년: 미얀마.서울 입체취재: 공작원 강민철 “한국 가고 싶다”(주간조선. 2003.10.02)

- 아웅산테러 20년: 굳게 닫힌 철문... 군인.경찰 ‘철통 경비’(주간조선. 2003.10.02)

- 아웅산 테러 20년: 잊혀진 유족들의 삶(월간조선. 2003.10월호)

- 운명의 나팔소리-버마 아웅산 국립묘소 암살.폭발사건(월간조선. 1983.11월호)

- “남도 북도 다 싫다” (주간조선. 1995.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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