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시민교육,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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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강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과 북한 정치의 전개 비교 I

북한 시민교육,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4-11-06 17:50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제헌국회를 구성, 8월 15일에 대한민국 건국과 동시에 제1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다.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의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었다. 이 안이 국내에 전해지자, 임정을 중심으로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어 반탁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신탁운동을 둘러싸고 임시정부측은 결사적으로 반탁을 주장한 반면, 박헌영의 조선공산당등 좌익측은 찬탁을 주장하여 의견이 엇갈리게 되었고, 이리하여 좌우의 제휴에 의한 민족통일공작은 절망적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1946년 1월, 미·소 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열렸고, 이어 3월에는 정식 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회의가 거듭되는 동안 차츰 결렬 상태에 빠졌고, 이 혼돈 속에서 타개를 위한 몇 가지 방도가 모색되었던 것이다.

첫째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민당이 호응하여 조직한 민족통일 총본부의 자율정부운동이었다. 얄타 회담과 모스크바 3상 결의를 취소하여 38선과 신탁통치를 없애고 즉시 독립 과도정부를 수립하라는 것인 정읍발언이었다.

한편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계통의 한독당은 국민의회를 구성하여 반탁운동을 근본으로 하되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을 실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런가 하면 김규식·여운형등 중간우파와 중간좌파가 주도하여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들 좌우합작운동 주도세력들인 중도파 인사들은 선임정후반탁을 주창하여 찬탁의 입장에서 미·소 공동위원회의 재개를 통해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동시에 좌익세력들은 남한의 정치·경제·사회를 교란하는 여러 수단을 사용하였다. 1946년 5월 정판사 위폐사건을 계기로 공산당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부산의 철도 파업을 계기로 일으킨 대구 폭동은 그들의 지하운동의 대표적인 예였다. 이 사건 이후 미군정은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창설하였고, 1947년 6월에는 미군정청을 남조선 과도정부라고 칭하였다. 1947년 5월에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무렵 미-소 냉전이 격화되면서 매카시즘열풍이 불던시기라 이 역시 미·소의 의견대립으로 양측의 입장만 확인한상태로 완전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9월 17일 미국은 한반도의 문제를 유엔에 제출하여 이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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