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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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48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쏘련사회의 붕괴와 도이췰란드의 통일은 김일성 부자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두 가지의 엄중한 경고를 보면서도 역사에 더욱 역행하는 길로 나갔습니다. 이에 황장엽은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찬 북조선의 현실을 감추고 반대로 선전하는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황장엽은 중국을 따라 개혁개방으로 나가는 것만이 북조선의 유일한 희망이라 생각하고, 중국 당국에 내심 기대하지만 중국은 그저 형식적인 태도만을 취했습니다.





나는 중국의 간부들에게 내가 개발한 인간중심의 철학적 원리를 이해시켜 그들의 도움을 받아보려고 했다. 그래서 아무리 바빠도 중국에서 오는 학자대표단은 예외 없이 만나 담화를 나누었으며 그들을 통해서 개혁 개방에 대한 내 견해를 중국당 지도부에 전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나라 일이 잘 풀리고 있었기 때문에 추상적인 이론에는 큰 관심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체철학이라는 것이 김정일이 주장하는 그렇고 그런 것이겠거니 지레 짐작하고는 상대도 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해외에서 이루어지는 국제토론회를 이용하여 인간중심의 철학적 원리를 외국사람들에게 인식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김정일이 김일성종합대학 학생일 때 창작사업을 많이 했다는 선전을 하면서, 나는 김대 학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철학적 원리의 기초를 김정일이 이미 예전에 제시했던 것처럼 꾸미도록 하는 일을 뒤에서 지휘했다. 이 일은 조직부 교시편찬과가 협조해 주어 큰 성과를 거두었다. 김일성종합대학 시절의 김정일 노작집이라는 것이 15권이 넘는 대문헌으로 종합되었던 것이다.



이 문헌은 새로운 주체철학에 대한 반대자들을 반박하는 데 무엇보다 좋은 무기였다.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김대 문헌집에 실려 있는 내용을 인용하여 반대파를 몰아붙였다.

이 작업을 끝낸 뒤, 나는 김정일의 명의로 인간중심의 유물론과 변증법의 원리를 쉽게 풀어쓴 글을 김정일에게 보냈다.



물론 그것은 하나의 모험이었다. 그 일이 성공하려면 먼저 문서정리실의 학자들을 주체철학으로 철저히 무장시키는 사업이 선행되어야만 했다. 예상대로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문서정리실장대리는 내가 서기실에 있을 때 뽑아온 김대 경제학부 졸업생으로 머리가 총명하고 글 재간도 뛰어난 친구였다. 그러나 주체철학의 진수를 파악할 만한 단계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문서정리실 학자들을 주체철학으로 무장시키려면 내 직속인 자료연구실의 연구원들이나 주체과학원의 학자들에게처럼 다년간 강의도 해주고 서로 논쟁도 시켜야 실력이 느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나의 지도 아래 공동집필 사업을 오래하다 보면 자연히 진리를 터득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여 문서정리실 학자들을 주체철학으로 무장시키는 일을 서두르지 않은 것도 하나의 실수였다.



그런 까닭에 내가 유물론과 변증법을 쉽게 풀어 발표하자 반대의견을 제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굳은 신념을 가지고 지지하지도 않았다.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었고, 또 그 문제는 바로 나의 허점이었다.



글을 보낸 뒤로는 한동안 조용히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김정일이 느닷없이 전화로 나를 찾았는데, 내가 자리에 없어 실장대리가 대신 전화를 받았다. 실장대리는 김정일과 이론문제로 의견을 나눈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하고 그저 김정일이 말하면 “예, 예” 하면서 끌려다닌 모양이었다.



김정일은 자기에게 글이 올라가면 물론 직접 읽어보지만, 한편으로는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216호실’(선전부 아래에 있는 5~6명으로 구성된 글쓰는 조직) 담당부부장이나 조직부 교시편찬과장에게 회람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그들은 철학에 관심이 없고 알지도 못했으며, 더구나 주체철학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내가 전화를 직접 받았더라면 충분히 설명을 하여, 비록 문건으로 채택되지는 않더라도 그것이 문제로 비화하지 않게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실장대리가 지레 겁을 먹고 공손히 대답하면서 김정일의 의견에 무조건 맞장구를 치다 보니, 김정일은 이번 기회에 나를 공격하여 자신의 이론적 권위를 높여볼까 하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자기가 말한 의견을 정리하라고 하면서 내가 써보낸 글을 선전부와 사회과학원에 회람시켰던 것이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선전부의 일부 일꾼들은 사회과학원의 교조주의자들과 합세하여 나에 대한 공격자료를 올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료들은 한 권의 책으로 묶어질 만큼의 분량이 되었다. 나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비서고 뭐고 다 그만두고 평당원으로 나앉을까 하는 생각까지 해보았다. 그래서 아내에게 내 생각을 넌지시 비쳤더니 정신나갔다면서 펄쩍 뛰었고, 나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말없이 추이만 살폈다. 결국 그 일은 애매하게 내 조수역을 한 과장(주체사상연구소에서 내가 데려온 학자)만 비판받는 걸로 낙착을 보았다.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김정일은 아직은 나를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은근히 내쪽을 다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철학문제에 대해서도 나를 지도할 능력이 있음을 시위한 것만으로도 만족했다는 뜻이었다.



늘 그렇지만 이번에도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



“순수한 철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주체사상연구소나 자료연구실 학자들이 토론하는 것은 무방합니다. 하지만 이번 글은 내 이름으로 발표할 수 없습니다. 참, 그리고 이번에 부부동반해서 중국으로 두어 주일 휴양을 다녀오시지요.”



김정일이 우리 부부를 국내도 아닌 외국으로 휴가를 보내주는 것은 하나의 선심이었다. 그리하여 1990년 11월, 나는 부부동반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으로 휴양을 떠났다. 내 마음은 줄곧 무거웠으나 아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아내는 대부분의 북한의 선량한 인민들과 마찬가지로 김일성에게 환상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김정일에 대해서도 그의 방탕한 사생활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좋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김정일도 내 아내에게는 잘 대해서 친필감사장을 주고 인민기자라는 최고의 명예호칭도 내렸으며, 자식들이 하나같이 공부를 잘하고 일도 잘한다면서 행복한 가정의 표본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선전이 필요하면 아내를 먼저 내세웠다. 그러다 보니 아내는 내막을 잘 모르는 인민들 사이에서 어딜 가나 떠받들어지는 입장이었다. 아내는 가정생활은 물론 개인생활에 대해서도 명예감과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로서는 아내의 만족감을 애써 깰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당내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일들과 나의 사상적 고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입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자유의 품으로 망명을 하면서까지 아내에게 진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잘못인 것 같다. 아내가 지금 나를 얼마나 원망할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48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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