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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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16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중쏘간의 사상 론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1960년 10월, 모스크바에서 81개국 공산당·로동당 회의가 열렸습니다. 양편으로 갈라진 론쟁은 만 1개월간이나 계속되었으며, 당시 회의의 핵심 쟁점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리행하는 과도기를 언제까지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끝났다. 따라서 점차 민주주의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사회발전 과정은 생산방식, 즉 경제제도와 생산력을 중심으로 봐야 한다. 소련은 사회주의 경제제도를 확고히 수립했고, 사회주의에 걸맞은 생산력을 갖추었다는 논리였다. 당시 소련은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만큼 과학기술이 발전해 있었다. 공산주의적인 민주주의를 시작하고, 미국과도 화해하자는 소련의 주장은 그런 자신감의 반영이기도 했다. 흐루시초프는 민주주의를 확대하기 위해 직업동맹의 역할을 높이고, 노동자들의 발언권을 확대하며, 개인숭배를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소련의 주장에 반대했다. 계급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과도기는 계속돼야 한다는 논리였다. 연설에 나선 덩샤오핑은 소련을 맹렬히 공격했다. “소련에서도 노동자와 농민 간의 계급적 차이가 있다. 계급이 소멸하기 전, 다시 말해 모든 계급이 노동계급으로 단일화되기 전에 과도기가 끝났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과도기가 끝났다고 주장한 결과 헝가리를 비롯한 각국에서 반혁명이 일어났다. 소련의 주장은 명백한 수정주의다.” 덩샤오핑의 연설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덩샤오핑을 비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설도 있었다.



조선노동당도 중국공산당을 지지하는 토론을 했다.



“중국공산당을 국제종파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중국공산당은 국제주의에 충실한 당이다.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그것을 증명했다. 조선전쟁에서 중국은 미국에 맞서 백만대군을 보냈고, 그 가운데 40만 명이 희생되었다. 국제주의에 충실한 중국공산당을 어떻게 국제종파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이 조선노동당의 논리였다. 역시 박수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흐루시초프가 연설할 때에는 모두가 일어나 박수를 쳤다. 중국을 지지했던 우리는 자리에 그냥 앉아 있어야만 했다. 모두가 기립해 박수를 치는데 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맨 끝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 좋은 호치민(Ho Chi Minh) 주석이 자리에서 자꾸 일어나 박수를 치려고 했을 정도였다. 물론 호 주석이 일어나려고 할 때마다 베트남의 레주언(Le Duan) 당 제1서기가 옷깃을 잡아 주저앉히는 바람에 끝내 일어나지는 못했다.

소련공산당과 그 지지자들은 중국공산당을 소련공산당을 반대하는 국제종파주의라고 비난했고, 중국공산당은 소련공산당을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하는 수정주의라고 몰아 붙였다. 서로의 의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브라질을 비롯한 일부 군소 정당 대표들은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을 우려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목이 메도록 개탄했다.



“10월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한 소련공산당과 2만 5천 리 대장정을 하여 중국혁명을 수행한 중국공산당이 싸운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이 방은 바로 레닌이 일하던 방이다. 서로 싸우는 우리를 레닌이 살아있다면 무엇이라 평가하겠는가?”



호치민 주석이 보다 못해 중재에 나섰다. 호 주석은 워낙 소탈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중재를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 주석은 류사오치와 흐루시초프를 자신의 숙소인 영빈관으로 초청했다. 처음에는 양측 대표 모두 다음날 아침 호 주석이 묵고 있는 영빈관으로 가겠다고 약속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영빈관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흐루시초프가 수행간부에게 물었다.



“류사오치가 영빈관에 나왔는지 알아보시오.”



잠시 후, 영빈관에 갔던 비서가 돌아와 말했다.



“류사오치 주석은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요?”



“어제 저녁에 글을 쓰느라고 밤을 샜다며, 피곤해서 숙소에서 쉬겠다고 했답니다.”



결국 호치민 주석의 중재 노력도 그렇게 무산되고 말았다.



류사오치는 영빈관에 가지 않겠다는 전갈을 보낸 후 “너희가 우리를 짓밟을 수는 있어도 뼈다귀는 부러뜨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중재를 의도적으로 거부한 것 같다.



김일이 국제전화로 김일성에게 회의결과를 보고하자 김일성은 이렇게 지시했다. “우리가 백두산에 다시 들어가 감자를 캐먹으면서 유격투쟁을 할지언정 소련의 대국주의적 압력에는 절대로 굴하지 말라.”



김일성은 사회주의 나라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국제전화는 소련 교환수들이 관리한다는 점을 고려해서, 오히려 자신의 말이 소련공산당 측에 들어가도록 더욱 큰 목소리로 말하였다.



다음날 나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회의가 결렬될 경우 북한의 입장을 밝히기 위한 성명서를 작성하기 위해 김일 단장과 함께 숙소에 남았다. 하루 종일 끙끙대다가 겨우 초안을 작성했다. 저녁 무렵에 마무리를 하려고 하는데 중소 간 화해가 성립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 측 국제부장이 돌아와 들려준 말에 의하면, 회의가 막 결렬되려던 찰나에 중국의 덩샤오핑, 펑전과 소련의 꼬즐로프, 쑤슬로프가 최종적으로 만나 담판을 지었다는 것이었다. 소련 측이 중국 측에 “중국은 우리를 계속 수정주의로 몰아붙이겠는가?”라고 말하자, 중국 측이 그에 지지 않고 받아쳤다고 한다.



“소련은 우리를 계속 국제종파라고 비방하겠는가?”



“아니다. 소련은 이제 중국을 비방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중국도 소련을 수정주의로 몰아붙이지 않겠다.”



“그럼 우리 양측이 레닌의 초상화 앞에서 맹세하자.”



“좋다!”



그리하여 소련과 중국의 대표들은 레닌의 초상화 앞에서 서로 비방을 않기로 맹세했다는 것이었다. 국제부장은 개인숭배를 반대하는 조항을 철회하도록 소련공산당에 요구하기로 한 북한·중국 간 약속을 중국대표단이 저버린 채 일방적으로 소련과 화해해 버렸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16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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