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 방송정보 | 종영방송
  • 출연진행:

공식 SNS

사회안전성 심화조 사건의 실체, 두 번째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2-01-13 17:49


내레이션: 김일성이 죽자 김정일은 자기 아버지의 측근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심화조 사건을 일으켰다. 1997년 말부터 3년간 진행된 이 사건으로 2만5,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숙청당했다. 권력의 전환기에는 늘 피바람이 몰아치게 마련이다. 김정일의 통치 방식을 계승한 김정은도 앞으로 심화조 같은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다. 김정일의 권력 장악 비화를 통해 김정은의 선택을 전망한다. 추적 사건과 진실, 사회안전성 심화조 사건의 실체.



지난이야기> 김일성이 죽자 김정일은 눈에든 가시였던 아버지의 측근들을 제거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봤다. 그러나 김일성이 죽고 식량난이 겹치면서 정국이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 상황이 이어졌다. 김정일은 때를 기다리는데.....



아니나 다를까 굶어죽는 사람의 숫자가 수백만을 넘어서고 황해제철소 로동자들의 농성투쟁과 같은 거대 반란이 속출했다. 김정일은 위와 아래를 다같이 장악할 수 있는 원자폭탄과도 같은 사건, 즉 일대 사상(思想)전쟁을 결심했다. 먼저 당 중앙 선전선동부에 지시하여 수령이 없는 틈을 노려 미 제국주의와 남조선 괴뢰들이 침략전쟁의 기회를 노린다’며 전쟁 분위기를 고취시켜 나갔다.



<삽입: 앞으로도 혁명무력은 남조선 괴뢰들이 우리 조국의 령해를 0.0001밀리 미터를 주저하지 않고 무자비한 군사적 대응 타격을 계속 가하게 될 것이다. 남조선 괴뢰들은 빈말을 하지 않는 다는 우리 혁명무력의 엄수한 경고를 새겨들어야 한다.>



또한 ‘혁명의 수뇌부를 암살하려고 테로분자까지 침투시킨다’는 내용으로 강연회를 비롯한 대대적인 정치공세에 나섬으로써 온 나라 주민에게 혁명적 경각성과 함께 강력한 조직적 통제를 강요했다. 사람들 누구나 김일성 사망과 동시에 전국에 내려진 군 동원명령의 연속으로만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몇 주일 후 당 선전선동부의 그러한 주장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바로 서관히 간첩사건이었다.



<삽입: 북한은 김일성 주석 사망 직후인 1994년부터 수 백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돼 체제 존립을 우려할 정도로 민심이 악화되자 1997년 서관히 당시 노동당 농업담당 비서를 평양에서 공개총살했습니다.>



온 나라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일성 밑에서 오랫동안 당 중앙위원회 농업담당비서로 일해 온 사람이 남조선 안기부 간첩이었다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놀랐다.



여1 (밉다는 듯) 여보, 거 서관히 사건 이야기 들었어요?

남1 들었지. 그놈 죽일 놈이더구만. 농사를 말아먹기 위해 토양에 맞지 않은 종자와 농약을 사용했다면서.

여1 글쎄 과일나무 가지를 자르지 않아도 되는데도 자르게 해 과일이 열리지 않게 했데요.

남1 당신도 그 소리 들었구만. 우리 직장에서도 서관히 그놈 때문에 인민들이 이렇게 굶어 죽는다고 말들이 많아.

여1 (나직하게) 그런데 여보, 서관히가 30년동안 암약한 미제의 고정간첩이라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일까요?

남1 (나직하게) 사실 나는 믿기지가 않아. 중앙당 비서가 미제 간첩이고 그 간첩이 공화국의 식량 문제까지 좌지우지 할 정도면 우리 체제는 다 끝장났다고 봐야지. 안 그래?



인민들은 한편으론 당국의 선전을 믿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김정일이 음모를 꾸미기 전까지 서관히는 큰 잘못이 없었다. 잘못이 있다면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일한 죄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으로 수백만 명의 인민들이 굶어 죽어가면서 민심이 당장 폭발할 상황이 됐다. 1997년 인구 17만의 김책시에서만 하루에 200여 명의 로동자가 굶어죽어 나갔다.



김정일은 자신의 모든 잘못을 뒤집어씌울 희생양이 필요했다. 당 조직지도부 행정담당 제1부부장을 지내고 있던 매제 장성택이 김정일의 지시를 받고 사회안전성을 통해 극비리에 간부들에 대한 뒷조사를 진행했다. 마침 서관히의 비료유출 자료가 손에 들어왔다. 비료 30t을 친인척들에게 장사 목적으로 빼돌렸다는 혐의를 받고 서관히는 사회안전성 산하 보통강구역 안전부에 수감됐다.



여1: (노크) 장군님 장성택 부부장 동지 왔습니다.

김정일: (문밖) 들어오라고 해.

장성택: 장군님, 서관히에 대한 조사 자료입니다.

김정일: (서류 건성으로 넘기는 소리, 책상 위에 탁 던지며) 장부장, 비료사건만으로 너무 약하지 않나?

장성택: 무슨 말씀이신지....

김정일: (버럭 소리를 지르며) 정치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배짱이 없어! 지금 정세가 얼마나 긴장한지 몰라!



눈치 빠른 장성택은 김정일의 심중을 간파했다. 그 길로 사회안전성으로 내려갔다. 장성택은 당 조직지도부 사회안전성 담당 책임지도원 리철, 사회안전성 정치국장 채문덕을 불렀다. 그리고 서관히 문제와 관련해 김정일이 자신에게 어떤 신임과 특권을 주었는지 면담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이번 기회에 사회안전성이 큰일을 터뜨려보라”고 격려했다.



김정일의 말 한마디로 서관히는 비료유출 경제범에서 안기부 간첩이 되었다. 서관히는 그로부터 한 달 뒤, 사회안전성 자체 예심기록문건이 완료됨과 동시에 입에 재갈이 물린 채 평양 거리의 인민재판장에 끌려 나왔다. 사건의 실감을 더해주기 위해 조연으로 간첩망 망책에 서관히의 첩자로 고용된 적이 있다는 어느 농촌의 한 여자 관리위원장도 같이 사형장으로 끌려나왔다. 그러나 사실 이 여성은 서관히 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경제범에 불과했다.



그녀는 재판이 시작되기 하루 전 사회안전성에서 나온 수사국 예심원에게서 다음과 같은 지령을 받았다.



“서관히가 자기 죄를 전부 부정하는데 그 자는 악질이어서 재판장에서도 묵비권을 행사할 거야. 동무는 우리가 써준 이 원고대로 그와의 연계성을 주장하며 간첩활동을 시인해. 그러면 내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다음날 그 여자는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순간순간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서관히 앞에서 수사국 예심원이 써 준 원고를 일장 연설하듯 읊어 나갔다.



추적, 사건과 진실 “6. 25전쟁의 진실” 사회안전성 심화조 사건의 실체, 두 번째 시간이였습니다.

전체 0

국민통일방송 후원하기

U-friends (Unification-Friends) 가 되어 주세요.

정기후원
일시후원
페이팔후원

후원계좌 : 국민은행 762301-04-185408 예금주 (사)통일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