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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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전쟁의 진실, 여덟 번째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11-11 17:26


나레이션: 1950년 6월 25일, 고요한 일요일 새벽의 평온을 무섭게 깨뜨리며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포성이 울려 퍼진다. 3년 동안 전개된 동족상잔의 엄청난 비극, 우리 민족 모두에게 커다란 불행과 고통을 들씌우고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킨 그 전쟁의 도발자는 과연 누구인가? 추적, 사건과 진실, 6. 25전쟁의 진실”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이야기> 김일성은 기습적인 남침공격을 개시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침공을 당한 남조선의 국군은 변변히 저항도 못해보고 후퇴만 거듭하는데…….



춘천 방어전으로 3일이라는 시간을 얻게 된 남조선의 국군은 그 사이 전렬을 재정비했다. 덕분에 한강방어선을 구축해 인민군의 공격을 일주일이나 막아낼 수 있었다.인민군은 남진이 크게 지체됐지만 개전 초기의 기세를 몰아 7월 20일 대전을 점령했고, 8월초에는 락동강 계선까지 밀고 내려갔다.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남조선의 전 지역이 인민군에게 장악되였다. 하지만 전세는 서서히 불리해지고 있었다.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던 김일성의 예상과는 달리 미국의 대응은 빨랐다. 6월 25일, 미국의 제의로 뉴욕에서는 긴급히 유엔안전보장리사회가 열리고 북조선에 대해 대남적대행위의 즉각 중지와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된다. 북조선이 응하지 않자 이틀 뒤 유엔은 미국을 비롯한 16개 유엔 회원 국가들의 파병을 결정했다. 유엔이 이 같은 결정을 신속하게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유엔안전보장리사회 상임리사국인 쏘련의 불참 때문이었다. KBS 기록영화 6.25전쟁 3부에서 딘 러스크 당시 미 국무장관의 말이다.



딘 러스크: “그때 쏘련 대표는 안전보장리사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그들이 행사할 수 있는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쏘련 대표는 안전보장리사회에서 중국해역에 관한 질문이 있은 후 회의장을 나갔습니다. 우리는 몇 년 후에야 조셉 쓰딸린이 유엔 쏘련대사에게 개인적인 전화로 안전보장리사회에 참석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유엔의 결정에 따라 미국은 신속히 남조선에 군대를 파병한다. 7월 1일, 일본에 있던 미 극동사령관 맥아더가 직접 남조선으로 날아가 전황을 료해하고 얼마 후 일본에 있던 미군 24사단을 남조선으로 급파했다. 7월 7일, 유엔의 결의에 따라 유엔군 총사령관에 맥아더가 임명됐다. 유엔군의 참전에 고무된 리승만 대통령은 남조선 국군의 작전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위임했다.



김일성은 크게 불안해하면서 급히 쏘련에 군사고문과 공군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김일성의 심리 상태를 옛 쏘련의 기밀문서 1950년 8월 28일자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쓰딸린: "…김일성 동무는 미군의 개입으로 전쟁에서 부분적으로 실패하는 것에 대해 당황해 할 필요가 없다. 김일성 동무는 조선은 혼자가 아니며 조선을 도와주는 동맹 국가가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공군을 분산시키지 말고 집중시켜야 한다. 필요하다면 우리 조종사들을 지원하는 방법도 검토하겠다."



쏘련의 격려와 공군지원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인민군에게 더욱 불리하게 돌아갔다. 8월 초 부산과 대구를 기점으로 국군과 미군이 락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승승장구하던 인민군의 공격은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인민군은 수안보에 전선 사령부를 두고 총공세를 펴지만 공해상을 완전히 장악한 유엔군의 방어와 공격에 여지없이 참패당했다. KBS 기록영화 6.25전쟁 3부에서 당시 인민군 6사단 최태환 중좌의 말을 들어보자.



최태환: “함포가 가장 무서웠어요. 다른 공습 같은 것은 얼마든지 눈으로 보니까 피할 수 있는데 함포는 보이지 않는데서 언제 포탄이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거든, 다른 건 피할 수 있는데, 함포사격에 제일 우리가 공포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 41:27- 41;36)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그냥 걸음아 날 살려라, 그건 뭐 암만 좋게 표현해도 도망이지, 우리가 보통 도망했다는 말, 하기 싫어서 퇴각이란 말 쓰거든요 퇴각, 실제는 퇴각이 아니라 도망이었어요.”



그 시각 맥아더는 전세를 일시에 뒤집을 수 있는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1950년 9월15일 새벽, 유엔군이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하자, 동시에 락동강 계선을 지키던 남조선 국군과 유엔군이 대대적인 반공격을 시작했다. 전쟁의 판세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인민군은 북으로 후퇴했다. 유엔군은 물밀듯이 진격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마침내 38선 계선까지 이르렀다.



10월 1일, 맥아더는 김일성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바빠 맞은 김일성은 쓰딸린에게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올 수도 있다며 쏘련과 중국의 군사개입을 요청했다. 하지만 쓰딸린은 쏘련의 직접개입불가라는 방침을 고수하면서, 김일성에게 북조선을 탈출하라는 권유까지 했다. 옛 쏘련의 기밀문서 1950년 10월 13일자 기록에 당시 쓰딸린이 김일성에게 전한 말이 남아 있다.



쓰딸린: "우리의 저항은 이젠 전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중국 동지들은 군사개입을 거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 당신은 쏘련이나 중국으로의 탈출을 준비해야 한다."



김일성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이승만은 기세를 몰아 조선반도 전체를 통일해야겠다는 각오로 국군 단독으로 38도선을 돌파하라고 지시한다. 10월 1일 국군 3사단이 최초로 38도선을 돌파했고, 유엔군도 8일 뒤에 38선을 넘었다.



당시 유엔군이 38선을 넘는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맥아더는 김일성이 항복하지 않는 한 조선반도 전역을 유엔군의 작전지역으로 간주한다며 북진을 강력히 주장하였지만 미국 정부는 주저했다. KBS 기록영화 6.25전쟁 4부에서 당시 ‘폴 니츠’ 미 국무성 정책기획국장의 말이다.



폴 니츠: “사실 국무성 측에서는 미국 군대가 중국이나 소련 국경선까지 북진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도화선이 되어 한국전쟁을 중국이나 소련과의 전면전으로 확대시키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쏘련과 중국이 섣불리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하게 된다. 마침내 미국은 9월 27일 유엔 총회에 3.8선 돌파 결의안을 제안했다. 쏘련이 그때만은 적극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해 38선 돌파 결의안은 부결된다. 하지만 10월 7일, 영국을 비롯한 서방 8개 나라가 다시 이 결의안을 유엔총회에 회부해 압도적인 표로 채택됐다. 이에 따라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해 10월 19일 평양을 장악하고 지체 없이 압록강 일대까지 밀고 올라갔다. 전쟁은 끝을 향해 가고 있는 듯이 보였다.



추적, 사건과 진실 “6. 25전쟁의 진실”여덟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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