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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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의 진실, 열두 번째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12-09 17:23


나레이션: 1950년 6월 25일, 고요한 일요일 새벽의 평온을 무섭게 깨뜨리며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포성이 울려 퍼진다. 3년 동안 전개된 동족상잔의 엄청난 비극, 우리 민족 모두에게 커다란 불행과 고통을 들씌우고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킨 그 전쟁의 도발자는 과연 누구인가? 추적, 사건과 진실, “6. 25전쟁의 진실”



지난 이야기> 량측이 38선에서 대치한 가운데 전쟁을 끝내기 위한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2~3일면 끝나게 될 줄 알았던 휴전회담은 의제를 선정하는 데만 보름이 걸리는데......



보름만에 휴전회담의 의제가 선정되고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됐다. 인민군과 유엔군은 안건마다 충돌했다. 휴전선을 설정하는 것부터 넉 달 이상 걸렸다. 량측은 현 전선을 휴전선으로 한다는데 합의했지만 한 달 내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지 않으면 다시 휴전선을 그어야 했다.



하지만 나머지 의제들도 쉽게 합의를 이룰 수 없었다. 최대 걸림돌은 포로송환문제였다. 당시 유엔군 측이 데리고 있었던 포로는 13만 2천여 명, 중국군과 인민군 측이 데리고 있었던 포로는 1만 1,000여 명이었다. 포로를 맞교환할 경우 중국군과 인민군의 병력이 크게 불어나는 셈이었다. 중국군 포로의 상당수가 본국 송환을 원치 않은 것도 문제였다. KBS 기록영화 6.25전쟁 6부에서 윌리엄 스툭 미국 조지아대 교수의 말이다.



윌리엄 스툭:“중국군 포로들의 4분의 3정도가 본국으로의 송환을 거부했습니다. 몇 년에 걸쳐 심각한 포격을 받은 북조선은 휴전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사실 북조선은 인민군 전쟁포로와 관련해 미국의 요구에 응할 의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전쟁포로 문제에 대해서는 응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중국군의 포로들이 중국으로 귀환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대만으로 가겠죠. 이는 중국 공산당에게 모욕이 됩니다. 만약 4분의 3에 달하는 그들 부대가 대만을 선택하게 된다면 말이죠.”



포로협상이 지연되는 사이 휴전협정 조인 시한은 끝났고 결국 휴전선 론의는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타협점을 찾을 수 없다고 여긴 유엔군은 1952년 10월 8일 무기한 휴회를 선언했다. 다시 회담이 재개된 것은 1952년 12월 3일 유엔총회에서 인디아 결의안이 나온 직후였다. KBS 기록영화 6.25전쟁 8부에서 당시 유엔의 인디아 대표 크리슈나 메논의 연설이다.



크리슈나 메논: “이 제안은 모든 포로들을 풀어주자는 것입니다. 포로를 억류하지 않는 것이 송환의 가장 첫 번째 행동입니다.”



송환거부 포로를 중립국 관리에 맡기자는 인디아의 결의안은 유엔 회원국들의 전적인 지지를 받았다. 한편 당시 미국 내 반전 여론 분위기에 힘입어 새로 당선된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3년 2월 대만 해협 봉쇄를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효과(OL): (한국전쟁 8부 08:50-08:57) 아이젠하워:“제 7함대는 더 이상 대만 군대의 공격으로부터 중국본토를 보호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조선전쟁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중국은, 대만의 공격에도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자,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다. 결국 중국은 포로문제에 관한 인디아 결의안을 받아들인다.



1953년 4월 포로협상이 재개됐고 그해 6월 합의가 이루어졌다. 포로협상만으로 무려 1년 4개월이나 걸렸다. 당시 현 상태의 휴전을 강력히 반대한 리승만 정부가 항의표시로 2만여 명 반공포로를 한꺼번에 석방한 사건으로 잠시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휴전회담은 빠르게 진척돼 갔다. 세계전쟁사에서도 가장 길게 진행된 회담, 그 원인은 배후에 있던 쓰딸린과도 관련이 있었다. 1951년 6월 6일 쓰딸린이 모택동에게 보낸 전보문이다.



쓰딸린: “나는 귀하의 휴전 제안에 동의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전쟁의 종결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는 조선반도 전쟁을 통해 중국군은 현대전을 습득할 기회를 얻게 되고, 둘째로는 미국의 트루먼 정권을 압박해 미국과 영국의 세계적 위신을 크게 저하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쓰딸린은 국제무대에서는 휴전회담을 찬성하면서도 모택동에게는 중국군의 현대전 습득을 구실로 계속 전쟁을 강요했다. 휴전협상 와중에도 전쟁이 빨리 끝나는 것을 막기 위해 회담의 진척을 계속 방해하기도 했다. 1951년 8월 12일, 모택동이 ‘양보를 해서라도 빨리 휴전협상을 끝내자’고 하자 쓰딸린은 단호히 반대했다. KBS 기록영화 6.25전쟁 8부에서 예브게니 바자노프 로씨야 외교아카데미 부원장의 말이다.



바자노프: “쓰딸린의 립장은 강경했습니다. 우리에게 휴전이 필요한 게 아니라 미국에게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북조선과 중국은 쓰딸린에게 제발 이제 그만 휴전하자고 빌게 되고 그래서 협상이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쓰딸린은 그 어떤 양보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립장이었습니다. 쓰딸린은 북조선이 전쟁을 계속 할수록 유리하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김일성은 전쟁이 장기화되자 견디다 못해 직접 유엔 안전보장리사회에 유엔군 측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는 조건 하에 빨리 정전할 것을 호소했다. 쓰딸린은 미국에 약한 모습을 보여주어 정치적 불리익을 초래했다며 김일성을 호되게 질책했다. 김일성은 따스 통신 기자를 불러 정전을 호소하는 기자회견까지 열지만 그것마저 쏘련정부의 통제로 보도되지 않자 고민 끝에 중국의 주은래를 내세워 쓰딸린을 설득하려 했다. 1952년 8월, 주은래와 쓰딸린 사이에 진행된 회담내용을 재구성해본다.



주은래: “쓰딸린 동지, 북조선은 더 이상 전쟁을 계속 할 여력도 의지도 없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인구의 10퍼센트나 굶주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쯤에서 전쟁을 끝내야 합니다.

쓰딸린: 북조선은 전쟁으로 잃을 것이 사람 목숨 밖에 없습니다. 현 상태에서 전쟁을 끝내면 우리에게 불리합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전쟁을 계속 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쓰딸린의 승인 아래 시작된 남침전쟁은 끝내는 것도 그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쓰딸린이 전쟁을 계속 고집한 것은 오로지 쏘련의 립장만을 위해서였다. 당시 쏘련 점령하의 동유럽에서는 경제난 악화로 련이어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고 살길을 찾아 서방으로 탈출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었다. 미국이 동유럽에 개입할 것을 두려워한 쓰딸린은 미국을 조선반도 전쟁에 계속 묶어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한 쓰딸린이 1953년 3월 5일, 갑자기 사망했다. 길고 긴 정전회담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추적, 사건과 진실“ 6. 25전쟁의 진실” 열두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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