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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15화 관저에 갇힌 아이들 (옵바위, 10월의 원산해수욕장)

등나무집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혜림은 다시 계절조처럼 모스크바로 돌아갔고 김정일 비서는 다시 발길이 끊기고 평양집은 다시 절간의 정적에 잠겼다.



할머니와 두 아이, 그리고 나. 우리는 원래 우리의 거처인 동평양집으로 돌아왔다. 사동나루가 내려다보이는 대동강 기슭 높은 벼랑에 올라앉은 이 집은 평양시내에서 공기가 제일 좋다는 주석궁이 강북이라면 그 하늘아래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강남쪽에 좀 더 상류에 치우쳐 있었다.



임진왜란 때 풍신수길이가 건넜다는 사동나루에서 올려다보이는 이 옵바위는 역사적인 곳이다. 우리가 살던 동평양관저는 바로 옵바위 위에 지어졌다. 평양집에도 없는 실내수영장은 옵바위를 뚫고 아래층에 있었고 부엌뒤 몇발자국을 옮기면 벼랑으로 나서는데 그 밑에 대동강 깊은 물이 감도는 컴컴한 소가 눈 아래 보인다.



정남이가 자랄 때 코끼리 잔등같은 바위가 강으로 쑥 이마를 내민 벼랑쪽에 놀이터가 있었다. 가시철망을 치고 거기에 사슴도 있고 칠칠한 등나무가 식물원보다도 더 넓게 정자를 이루어 우리는 자주 거기에 나가 앉기도 했다.



해설: 성혜림과 그 가족들은 3개 관저를 사용했고, 나중에는 두 개만 주로 사용했다. 그것은 중성동 관저와 동평양 관저다. 리일남은 김정일의 관저를 궁전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화려했다.



리일남: 관저 내에는 정남이 오락장, 침실, 서재, 김정일의 접견실, 금고실, 부부침심, 개인침실 등이 있었다. 관저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위한 아파트가 영내에 있었다. 관저 운전사, 경호원, 이발사, 재단사, 등이 거주했다. 관저내에서 건물과 건물사이를 오갈 때는 작은 밧데리 차를 타고 다녀야할 정도다.



해설 : 이들이 주로 사용한 중성동관저는 건평이 2천평 정도로 집안구경에만 하루가 걸렸다고 한다. 김정일은 자신과 그 가족들을 위해 이런 관저를 평양에 여러 개 두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그 등나무 밑을 잊은 지도 오래고 거기에 쳐놓은 빨랫줄이 쓸쓸히 삭아가고 있었다. 남향 양지바른 곳에 있는 이 주택은 잡아다 놓은 날짐승 같은 정남과 남옥의 지친 푸드덕 날갯짓 외에는 인적이라곤 없었다.



꼭 같은 매일이 기약도 없이 반복되는 따분하고 역겨운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눈부신 대리석 정원 길은 검불하나 없이 너무도 깨끗했다. 내 서재 넓은 창은 한가득 정원을 안고 있는데 나는 햇볕이 내려 비치는 눈부신 길이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차일을 내린다.



비가 오거나 흐려 하늘이 푸근히 내려앉으면 오히려 마음이 놓이고 그래도 편하다. 어쩌다 남옥이가 찻잔을 두 개 받치고 내 방에 와주면 그런 선심이 없었다... 언제나 침울하던 그 애는 이런 선심을 자주 쓰지 않았다.



생활이 없는 우리는 화제도 없었다. 묵묵히 찻잔을 들고 내려다보는 죽은 마당은 우리를 세상과 차단시키고 있는 공간일 뿐이고. 이 막힌 생활을 열어줄 사람은 김정일 비서뿐인데 그에게는 아무 방안도 관심도 없었다. 우리는 잊혀진 땅이고 아무런 전망도 없었다. 옵바위 집은 고급감옥. 우리는 모두 무기수였다. 그 참을성 많은 할머니조차도 고개를 가로저으셨다.



할머니 : “이게 뭐냐,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는 또 그렇다 하자. 저 애들을 어떡한단 말이냐, 공부도 안 시키고, 일도 안 시키고.”



지도자는 먹을 것이 없고 더운물이 없어 목욕을 못하고 비누가 없는 인민들에 비해 ‘풍요롭게’ 살고 있는 우리에 대해서 “나는 너희들 생존을 보장해주면 되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점점 더 깊어갔다.



나는 김정일 비서가 남옥이를 결혼시키는 경우에도 사회에 내보내지 않고 남자를 우리집안에 끌어들여 군복을 입혀 보초장이나 시킬 계획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사람은 이 울타리 안에서 우리를 가두어 죽을 때까지 내놓지 않겠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정남이는 다 큰 신사였고 남옥이는 혼기를 지나고 있는 무르익은 처녀였다. 그러나 얘네들은 할 일이 없었다. 갈 곳도 없었다. 그 애들이 합법적으로 갈 수 있는 데는 병원밖에 없었다. 옥류관 국수도 집에 받아다만 먹을 수 있었다.



애들이 답답해서 차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돌아봐야 볼 것도 없고 볼 것이 있어도 차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우리 집 차번호는 그때 모조리 33333이었는데 이것은 보위원들이 이 번호의 차들이 어디 다니는가를 쉽게 알게 하기 위해 김정일 비서가 붙여준 번호다.



하루는 과장에게 전화가 왔다.



과장: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전화 받습니다.



김정일: 리 과장, 애들 집에 있는가? 어디 나가지 않았댔는가?



과장: 네. 외출하지 않았습니다.



김정일: 그래? 알았어.



<전화 끊는다. 잠시 후에 다시 전화벨>



김정일: 너 뭐하는 새끼야, 우리차가 사고를 쳤다는데 왜 거짓말을 하고 있어!”



운전사들이 모두 문초를 당하고 화살은 남옥과 정남에게 돌려졌다. 사실 애들이 과장 몰래 뒷길로 빠져 시내에 나가는 일도 많았다. 과장이 사색이 되어 현관 앞에 와서 “선생님이 근거를 쥐고 말씀하시는데 큰일났습니다.”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하느님 덕분에 애들은 그날따라 ‘자유주의’를 안하고 집안에 조용히 있었다. 이 소동은 밤 11시가 넘어서야 해명되었다. 우리 집 차번호와 같은 번호는 중앙당 4과였는데 4과 그 누군가가 사람을 치고 도망쳤다는 것이다.



정남이는 과장을 통해 아버지의 감시를 받고 있어 자유주의하기가 매우 곤란했다. 그 애는 제 아버지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애들이 원산해수욕장에 가겠다는 승인이 힘들게 하달되었다.



그 넓은 바다 모래벌에 두 아이와 운전사들만이 움직이는 허허한 피서의 서글픔. 우리는 한두번 경험한 것도 아니지만 해마다 더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이는 정일비서가 이미 집을 떠났고 그토록 사랑하던 정남이 마저 버리고 마는 단계에 이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모스크바, 제네바로 전전하다 끝내 평양으로 철수 했을 때 정남은 귀여운 어린애가 아니었다. 턱이 시퍼런 18세의 총각이었다. 그 사이 제 아버지는 딴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아들, 딸을 보았다. 그는 정남에 대한 그 비정상적인 ‘눈물의 애정’을 새 아이들에게 옮겼다.

이런데 총기가 멀쩡한 정남이가 돌아오자 그는 자기 속이 들키는 것 같은 멋쩍음과 아들에 대한 배신의 갈등을 느꼈다. 숨어 시작한 신접살림이 이 큰아들에게 들키는 꺼림칙함. 모처럼 길 닦은 유학에서 최우등생으로 끝까지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온 것도 유감인데 그 이유라는게 정남이 사내끼를 피운 것이라는 게 몹시 못마땅했다. 자신의 체험으로 이제 그 아들이 휩쓸 청춘의 ‘방랑’이 염려롭기 짝이 없었다.



그해 원산 바닷가에서 우리는 버려진 기분이었다. 그가 차요시하는 첫째 징표는 먹을 것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것이다. 그 바쁘신 나라의 총수께서는 끼마다 우리의 부식물을 수표해 줘야 타다 먹을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 놓았는데 먹을 것이 오지 않거나 청구품이 다 삭제되고 최소한이 도착하는 수모를 경험한지 오래다.



여름이 가고 바닷물이 차가웠고 이미 철 지난 이끼색으로 변했으나 평양으로 돌아가겠다는 애들의 제의는 승인이 나지 않았다. 매일 모사기나 전화만 기다리는 두 아이의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 없었다. 그 10월의 바닷가에서 두 아이를 보며 그 망망한 바다가 납으로 굳어지는 것 같은 무서움을 느꼈다.







원작: 성혜랑

극본: 최수연, 리유정

연출: 박은수, 남유진

낭독: 최연수, 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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