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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12화 4차원 공간으로 사라진 아이

등나무집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학교에 전화를 했더니 아이가 전화를 걸어 머리가 아파 병원에 간다고 하고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곡절이 생겼다. 이게 무슨 일일까? 전차를 타고 학교까지 가서 선생을 만나 다시 같은 말을 듣고 떡메로 정수리를 맞은 것 같은 아뜩했던 순간 이후 내가 허둥댄 그 모든 얘기를 다 적을 수가 없다.



장미공원 옆에 있는 말만 들었던 대사관을 찾아가 진충국 대사를 만나고 갈팡질팡 헤매는 사이 결과는 적의 납치라는 어마어마한 사고의 단정으로 육박하고 있었다. 진 대사는 가장 노련한 북조선의 외교관으로 한평생을 보낸 내가 인정하는 실력가였다.



나는 아이가 돌아오지 않은 다음날 이 사실을 평양에 보고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때 조선노동당원이던 나의 입장은 아이를 잃은 손실이 나 개인의 사건이 아니라 당에 끼칠 정치적 손실이라는 엄중한 책임감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애가 교통사고로 최악의 상태를 맞는다는 가정보다도 내게는 그것이 더한 고통이라는 의미다.



나는 제네바에서 평양에 전화거는 법을 몰랐다. 사회주의 나라는 외국전화를 통제하기 위해 반드시 국제교환을 이용하는 때였는데 그 교환의 불친절과 무조건 자르는 자세를 알고 있었다. 그때 퍼뜩 일본교환을 찾아볼까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일본도꾜 전화국을 찾았다.



상냥한 교환의 육성이 들릴때 나는 37년만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일본말로 정신없이 지껄였다. “나는 아들을 잃은 엄마다 북조선 평양에 전화를 해야겠는데 통하지 않는다. 나를 좀 도와달라. 모스크바 교환에게 북조선 교환을 좀 연결시켜달라고 해달라.” 라고.



교환수 : 평양입니다. 말씀하십쇼.



멀고 귀익은 북조선 교환수의 목소리가 들릴 때 “중앙당 교환주세요. 급한일이야.”하고 나는 총을 쏘듯 권위를 부렸다.



“중앙당 교환입니다 말씀하십쇼.” 하고 곧장 나온다. “여기 제네반데 지도자동지 대라”하고 나는 명령했다.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일이며 놀라운 일인지 모를 것이다. 지도자에게는 이렇게 교환을 통해 직접 거는 법이 없는 것이다.



교화수 : 동지 누구십니까? 그렇게 못합니다.



나는 “알구 있어. 그런데 연계해야 될일이야 빨리 연결하라.” 했더니 잠시후 “여보시오”하는 석쉼한 귀 익은 지도자의 목소리가 나왔다. “접니다 선생님” 그가 나를 알아챌 순간을 여유 두고 “선생님 여기 날씨가 나쁩니다. 제가 모스크바에서 가져온 트렁크를 잃었습니다.”



날씨가 나쁘다는 것은 정치정세가 나쁘다는 소리고 모스크바는 나의 아들을 의미했다. 지도자가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근거는 이런 위급한 일이 아니고 있을 수 없는 전화 호출 자체에서 비상사고를 그가 염두에 둘 것이기 때문이었다.



김정일 여보시오. 진정하라. 너무 속단하지 말고 좀 기다려보라. 며칠 어디에서 돌다가 다 시 현지로 돌아올 수 있잖아. 내가 사람을 곧 보낼테니 안심하고 기다리라...”



지도자의 목소리는 가라앉고 신중했으며 내가 얼마나 당황하고 갈팡질팡할 것인가를 가늠해주는 위로가 배어있었다.



전화국은 장미공원 뒤 작은 골목에 있었다. 거기서 나온 나는 다리에 힘이 빠져 그 계단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울었다. 내가 끼고 앉은 큼직한 핸드백 안에는 든든한 노란 빨랫줄이 있었다. 나는 무슨 타산에서인지 그 빨랫줄을 들고 다녔다. 그 어느 때든지 죽자하고. 그 결심의 기준은 지도자였다. 그가 나의 책임을 책망하고 화를 내면 나는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사흘 후에 두 부부장이 제네바로 날아왔다. 그들은 제네바 대표부에서 낮과 밤을 이어 일남이를 찾기 위한 적극적인 사업을 펼쳤다.



지도자에게 돈을 암만 드리고라도 아들을 찾아주라는 지시를 받고. 그들은 개인 정탐을 채용하고 갈 수 있는 나라들을 다 찾아나서는 등 최선을 다하게 되었다.



단 한통의 전화도 그 어떤 단서도 찾을 길 없이 시간이 가고 날이 흘렀다. 1시 5분에 올거라고 손을 흔들며 스스로 승강기를 타고 내려간 이래 더는 그 무엇도 그 애와 관련하여 일어나지 않았다. 이 순간 그 애가 어디에 있었으며 어떻게 해서 엄마보고 같이 점심 먹게 기다리라던 약속을 어겼는가를 알기까지 13년간 나는 나뭇잎이 살랑하는 소리에까지 귀를 기울이는 초 예민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능력한계이상으로 아들을 찾아 헤매었다.



아이가 없어진 다음날 진중국대사는 남한 노신영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납치해간 우리 아이를 내놓으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네 대사관을 폭파하겠다.” 남한 외교관 정참사는 “우리는 전혀 모른다. 아이를 찾는걸 도와주겠다. 참 유감스러운 일이 생겨서 안됐다”고 했다.

문선명 집단을 찾아보겠다는 우리 말을 듣고 그것참 그럴듯하다고 자기가 앞장서서 문섹트를 안내하고 다녔다. 점잖은 정참사, 그 사람은 15년후에 사실이 이렇게 밝혀질 것을 짐작하지 못했단 말인가. 아이를 서울로 빼돌리고 이렇게 위장행위를 한 것은 정치인가, 외교인가.



이일남: 나는 1982년 9월 제네바에서 남조선으로 가게 됐다. 평양을 떠날 때 제네바에 있으면서 기회가 닿으면 미국에 가봐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려면 미국대사관에 직접 전화하면 되겠지만 영어를 모르는 나는 우선 남조선 대사관에 연락을 했던 것이다. 대사관 직원들은 남조선에 가면 미국에도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나에게 남조선행을 권했다. 나는 그렇게 남조선 땅을 밟았다. )



해설: 성혜랑은 이 사실을 모른 채 미친 듯이 아들을 찾아 헤맸다.



대사관에 아이 실종을 신문에 내기로 했다. 사진과 함께 기사가 났고 그 애 얼굴이 제네바 시내 도처에 광고로 붙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와함께 전차를 타고 내리던 종합대학 네거리 군밤장수 하꼬방 문짝에도 얼굴이 있고, 구직광고가 붙은 학교 게시판에도 그 애 얼굴이 붙었다.



이렇게 사건이 사회화되고 국제화 될수록 나의 슬픔과 괴로움이 큰 진폭으로 확대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생겨났는가? 차라리 명백하게 교통사고를 당했다든가 깡패에게 끌려갔다든가 눈사태에라도 깔렸다면 놀라움과 충격은 당한 불행의 크기 만큼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무언지 모를 일이라는 것은 공포도 불안도 한계가 없었다.



국제경찰 스위스경찰, 유럽의 개인경찰 그 많은 전문가들의 엇갈리는 추측 중에서 단 한 가지 공통된 사실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사고라면 그것은 어디에서든지 알게 되어있기 때문에 이렇게 아무 소식 없다는 것은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에게서 제일 풀리지 않는 의문은 그 애가 잡혀갔느냐 자의로 갔느냐였다. 제가 없어지면 엄마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잘 안다. 때문에 꼭 떠나야했다면 후에라도 내가 안심할 수 있게 어느 구석에 쪽지라도 남겼을 것이고 어느 먼 곳에 갔더라도 전화를 걸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4차원공간으로 꺼지듯 티끌만큼의 단서도 없이 사라진 아들을 찾아 헤맨 15년은 추억조차 끔찍한 길고 긴 악몽이었다.







원작: 성혜랑

극본: 최수연, 리유정

연출: 박은수, 남유진

낭독: 최연수, 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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