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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11화 내 죽어도 니 모스크바 구경 다하고

등나무집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1978년이었다. 지도자는 나에게 모스크바를 다녀오라고 하였다. 그때 혜림의 병이 제일 심할 때였다. 모스크바의 엄혹한 겨울, 나는 이국의 정서도 외국에 나왔다는 해방감도 느낄 수가 없었다. 바빌로바 집은 평양집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간호사: 움직이지 못하게 다리 꽉 잡아요



혜림은 병이 심해 밤마다 구급차가 와서 독한 주사를 놓아줘도 자지 못했다. 불안발작이라는 차마 볼 수 없는 신경병은 본인의 고통도 형언키 힘들다지만 곁에서 보기도 괴로웠다.



일남이는 하루한번 코끝도 볼 수 없었다. 그때 일남이는 만경대학원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모스크바 유학 중에 있었다. 뒷골방에 쳐박혀 나타나지도 않고 언제 어디서 밥을 먹었는지도 모르게 이모를 피해 숨어 다녔다. 마주앉을 시간도 없이 내 정을 베풀 여유가 없었다. 통역원 말이 이모의 눈에 띄어 화풀이를 당할까봐 애가 기를 못 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애는 맘이 약했다. 순진했다. 아름답고 세도 높은 부유한 이모가 하늘만큼 우러러보여 반감도 가질 수 없고 그저 무섭고 이모의 병이 걱정일 뿐이었다.



모스크바에서의 그의 환경은 정 붙일 곳이 없었다. 그 애는 엄마까지 경원시하여 아무것도 실토하지 않았다.



나는 “얘 너 춥겠구나 솜외투 없니?”하고 아들을 걱정하자, 그 애는 “엄마 그런 말 하지마 내가 싫다구 그랬어. 이모한테 말하지 마.”하고 말한다.



혜림은 병원에 실려가서는 끊임없이 집에 전화를 거는데 좀 늦게 받거나 할 말이 없어 뜸하게 대답하거나 ‘열성이 없으면’ 섭섭해 했다. 나도 환자 걱정에 정신이 없어 일남이에게 더 이상 신경을 쓸 수도 없었다. 아무렴은 학원에서 고생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그 애가 러시아어에 딸리는 것을 개인지도를 시켜 보충해주어야 했는데 그 돈을 동생에게 달랄 수가 없었다. 나는 양보하고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 들어간 혜림은 차도가 없었다. 면회하러 병원갔다가 떠나오던 길. 모스크바의 겨울은 4시면 캄캄해진다. 도시가 크기 때문에 자동차로 한시간이상 달려야 했다. 사람들은 그 추위에도 입김을 날리며 쌍쌍이 끼고 밤거리를 산책한다. 전기가 흔한 모스크바 거리는 불빛이 휘황했다. 아파트마다 성애가 얼음틀처럼 둘러싼 김서린 유리창 안에는 따뜻한 불이 켜있고 평범한 사람들의 단란한 모습이 그리울 만큼 다정히 박혀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이 생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병난 혜림이, 울안에 갇힌 정남이와 남옥이, 허울뿐 유학생인 불쌍한 내 아들의 위축과 방황...



하루는 아침 첫시간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환자가 집에 다녀오겠다고 한단다. 병원에 갔더니 벌써 옷을 갈아입고 혜림이 현관 장의자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서는 우리를 보고 반색하며 뛰다시피 현관을 빠져나왔다.



혜림은 “집에 좀 갔다가 올래. 나 참 병원 싫어. 낮에만 있다가 밤에 가게 해줘.”하고 애원했다. 나는 목이 메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불쌍한 아이, 이 아름다운 인간, 내가 젤 살뜰한 혈육인데 나조차 그 애를 귀찮아하고 있는데...얘를 어떡하나.



제방에서 눕도록 권고하고 진정하는 것 같아 내 방에 와 정신없이 앉아있었다.



혜림: 뭘 하니? 너 우니?



하며 내 앞에 마주 앉았다.



어릴 때부터 개구리처럼 앉는 그 애의 앉음새로 마주앉아 내 무릎을 짚는다.



그리고는 “혜림: 그래싸치 마라.”하고 경상도 사투리를 흉내냈다. 그 애가 좀 농이 하고 싶을 때 하는 버릇이다.



“혜림: 내 이래 병 났어도 니 모스크바 구경 다해보고 안 좋나.”하고 웃는다. 이것은 단편소설 <원보>의 대사이다. 대학 때 활동했던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원보가 서울 다리 밑에 와 죽으면서 아내를 위로하는 말.



“내 이래 죽어도 니 서울 구경 다 해보고 안 좋나.”



이 순간 그가 어떤 말을 했다해도 제 마음을 이 대사만큼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괴로운 모든 순간에 ‘내가 이렇게 병났어도 아버지, 어머니, 혜랑이네 식구를 건졌으니...’하는 위안을 가지려 했을 것이다.



이것이 끊임없이 그 애의 핏줄을 도는 자신에게 호소하는 합리화였다.



그 후 정남의 제네바 공부길이 열리고 모스크바로 애들이 모이고 외롭던 모스크바는 그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 운명을 주관하는 신은 또 새 각본을 쓰고 있었다.



82년 여름방학에 어머니와 혜림은 애들을 데리고 평양으로 나왔다. 나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소식을 모스크바에 알리지 않았었다. 혜림이는 아버지에 대한 깊은 연민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병에 타격을 줄 것이고 고령에 어머니가 혼자 나오실 수도 없는 형 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김정일 비서에게서 우리집으로 전화가 왔다. 모스크바에 알려야하지 않는가하고. 나는 말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 사람은 감춰달라는 약속을 잘 지켜준다. 총체적으로 그는 비밀을 좋아한다.



그해 여름 애들이 다 나왔을 때 그는 대단히 기분이 좋았다. 나는 그가 새 여자에게서 아들을 낳은 예감이 들었다. 신천수영장에서의 한마디, 72호, 원산바닷가에서의 어떤 힌트. 후에 정말 그때 내 예감이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기분이 좋았던 그는 일남이를 대학에 못 보내 준 대신 제네바에 데리고 가 공부시키라는 허락을 내렸다.



그해 9월 7일 우리는 다함께 모스크바로 떠났다. 할머니, 혜림이, 나, 정남이, 남옥이와 일남이. 일주일 모스크바에서 쉬고 제네바로 들어가라는 지시에 따라 9월 14일 나는 아들을 데리고 이철국장과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제네바로 갔다. 오후 4시 비행기였기 때문에 점심을 먹고 바빌로바 집을 떠났는데 3층 운전사대기실 창에 남옥이가 서서 떠나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남옥아 기쁘지? 엄마에게도 이런 날이 있구나.”하며 남옥이를 보았다.



어려도 심각하던 딸애의 마음속에 언제나 불쌍한 엄마로 비쳐져있는 나를 교정할 수 없었는데 저 애가 지금 얼마나 좋아할까 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었다.



그러나 도착한지 불과 두주일 만에 나는 엄청난 일, 그 후 나의 생을 먹칠해버린 사건을 당했다. 다시 쓸 수조차 없는 일. 그날의 일기를 뜯어 여기 보충한다.



9월 28일 화요일. 조선의 기후와 비슷한 제네바의 이날 역시 무르익은 가을이었다. 아직 난방이 되지 않은 방안에는 싸늘한 벽지에서 가을 냄새가 풍기고 맑게 갠 아침인데도 방은 엷은 잿빛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따뜻한 이불의 온기를 아끼며 누운채 베개 위에서 고개를 젖히고 창틀에 꽉찬 푸른하늘과 그리로 뻗어 나온 줄기찬 침엽수의 싱싱한 한쪽 팔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날씨가 좋다. 벌떡 자리에서 튀어 일어났다. 희망이 있으면 하루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세면장 문소리가 났다. 그렇지 그 애가 있지. 요새 나는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10년만에 같이 살게 된 아들이다. 그날따라 학교에 혼자 가겠다는 아이는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원작: 성혜랑

극본: 최수연, 리유정

연출: 박은수, 남유진

낭독: 최연수, 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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